사도행전 15,1-2.22-29 요한 묵시록 21,10-14.22-23 요한 14,23ㄴ-29 (17,20-26)
기도를 믿는다는 말과 하느님을 믿는다는 말은 동의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당신의 계명을 지키라고 명령하시고 그 지킬 힘이 되실 성령님을 보내주실 것도 약속하십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평화가 당신의 계명을 지키게 할 것입니다.
하지만 성령을 주시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가야 합니다.
갔다가 다시 돌아온다고 하십니다.
아버지께서는 당신보다 위대한 분이시기 때문에 이것이 우리에게 기쁜 일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어머니가 자녀들에게 공부하라고 하고 남편에게 가서 돈을 받아서 자녀를 위해 먹고 살 걱정 없이 해주는 것과 같습니다.
자녀들은 이 평화 속에서 어머니의 뜻을 잘 따를 수 있게 됩니다.
그러니까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가는 것을 기뻐해야 합니다.
돈을 벌어다 주는 사람은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어머니가 아버지께 돈을 받으러 가는 것을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 가는 것으로 비유한다면
이를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기도라는 큰 그림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기도는 내가 말씀과 성령을 주어야 할 자녀들을 위해 그것을 주실 분을 만날 줄 아는 능력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기도할 수 있다면 걱정할 일이 없습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하느님을 만나러 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도할 줄 모른다면 이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하느님께서 나보다 위대하신 분이심을 믿지 않는다는 말과 같습니다.
이는 내가 더 위대해서 하느님을 나의 뜻대로 움직이려는 잘못된 신앙에서 비롯됩니다.
평소에 내가 하느님을 좌지우지하지 않고 내가 그분께 좌지우지하시게 했다면 언제나 기도를 드리고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힘든 일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에게 ‘기도하면 다 된다’라는 식으로 말하면 그들은 아직 기도할 단계는 아니라고 합니다.
마치 자신들이 그러한 처지가 된 것이 하느님 탓을 하는 것 같습니다.
화가 나서 하느님과 대화하지 않으려 하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기도 하지 않는 신앙은 그래서 하느님의 전능하심을 믿지 않는 것이고 그 이유는 내가 더 위대한 존재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강력한 허리케인이 미국의 플로리다주를 강타한 적이 있었습니다.
기상 역사상 그 유래를 찾을 수 없을 만큼 대형 허리케인이 카리브해에서 발생해서 예고도 없이 플로리다주를 강타한 것입니다.
그곳에 조그마한 호수가 하나 있었는데 이 호숫가에 찰스 시어즈라는 사람이 그의 아내와 세 명의 어린 자식들과 함께 사는 집이 있었습니다. 순식간에 다가온 허리케인에 의해 호수의 제방이 무너져 버렸고 그로 인하여 집이 허물어졌고 간신히 빠져나왔지만, 온통 물바다였습니다.
가까스로 조금 높은 지역에 있는 고목을 찾아 피신하였습니다.
그러나 물은 순식간에 차올라 점점 고목도 물에 잠기게 되었는데 그럴수록 이들은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하다가 결국 나무 꼭대기까지 오르게 되었는데 더는 올라갈 수 없는 처지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폭풍우는 계속되고 물은 계속 불어나고 있었습니다.
살아날 가망이 없다고 느껴지자 찰스가 절망적으로 중얼거렸습니다.
“여보 이젠 틀렸어.” 그 말은 단란했던 다섯 식구의 종말을 의미했습니다.
그의 아내는 그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여보, 그런 말아요, 무슨 수가 생길 거예요. 당신은 아이들이나 잘 보호하세요.”
그것은 소망이 아니라 마치 절규와도 같은 소리였습니다.
물은 점점 차오르더니 이젠 물이 어른들의 턱까지 차올랐습니다.
한 손으로는 나뭇가지를 붙잡고 한 손으로는 아이들을 찰스와 그의 아내가 물 위로 바쳐 올렸습니다.
이제 조금만 차오르면 그나마 가망이 없어지는 상황이었습니다.
찰스는 다시 중얼거렸습니다.
“이젠 틀렸어! 여보.” 그러자 그의 아내는 물을 삼키며 하늘을 향해 부르짖었습니다.
“아니에요, 여보. 우리는 살 수 있어요.”
그리고 순간 찰스의 아내는 무엇인가 그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음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신앙을 잊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보 우리가 주님을 잊고 있었네요. 주님은 우리를 살려 주실 거예요.”
그들은 최대한 목을 물 밖으로 내밀고 찬송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너 근심 걱정하지 말아라. 주 너를 지키리. 주 날개 밑에 거하라. 주 너를 지키리.
주 너를 지키리. 아무 때나 어디서나 주 너를 지키리. 늘 지켜주시리.”
그 순간 찰스와 그의 아내는 두려움이 사라지고 감사가 솟구치는 감정을 감당할 수 없어서 울음을 터트렸습니다.
자신들을 안타깝게 지켜보시는 주님의 현존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때 그들은 호숫가에 있었던 낡은 배 한 척이 자신들을 향해서 떠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의 가족들은 그 배를 타고 그곳을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극적으로 살아난 그들이 간증한 것을 「가이드 포스트」에 게재한 실화라고 합니다.
우리가 이러한 상황에서도 기도할 수 없었던 이유는 내가 그분의 능력을 믿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분의 사랑을 의심했기 때문입니다. 그분에게 원망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평소에 하느님 사랑에 감사하는 마음을 키웠다면 나는 그분께 무언가를 청해도 합당한 사람이라는
믿음이 생겼을 것입니다.
그러면 기도할 수 있는 것이고 모든 것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기쁨이 충만할 것입니다.
반면 기도하지 않으면 하느님 사랑도 믿지 않고 하느님 능력도 믿지 않고 나를 당신 자녀로 삼아주셨음도 믿지 않음이 드러납니다. 어떻게 하느님을 위대한 분으로 믿으며 그분께 청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우리는 마지막 순간까지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이 희망은 주님께서 주신 희망입니다.
믿음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이 믿음도 주님께서부터 받은 것입니다.
사랑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마지막까지 하느님을 믿는다면 결국 마지막까지 믿을 수 있는 것은 ‘기도’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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