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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5월 13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홍보실 작성일 : 2022-05-13 조회수 : 1987

요한 14,1-6 
 
사랑의 흐르는 본성 때문에 사랑이 있으면 질서가 반드시 생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이 당신이 아버지께 가시는 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길로 가는 것이 당신만을 위한 일이 아니라 제자들이 거처할 곳을 마련하러 가는 것이라고도 합니다.  
 
이는 성막을 짓기 위해 모세가 시나이산에 올라가 40일을 머문 것과 같습니다.
모세를 따르는 이들은 그래서 하느님의 거처를 마련할 수 있게 되었고 그 거처에서 머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거처가 곧 가나안 땅이었습니다.  
 
이 모든 신비를 예수님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 라고 정리해주십니다.
‘길’은 통로입니다.
모세가 곧 하느님께 머무는 통로가 되어준 것처럼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만이 아버지의 집에 머물 수 있습니다. 
 
‘진리’는 계시입니다.
예수님을 본 것이 곧 아버지를 본 것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께서 주시는 진리와 은총을 흘려주시기 때문입니다.
또 예수님은 ‘생명’이십니다. 
은총이 생명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가시는 방법은 십자가의 자기 봉헌입니다.
항상 제물 위에 성령의 불이 내려오십니다.
성령은 생명이시기에 당신을 생명으로 인정하는 이에게만 오십니다.
하느님을 생명으로 인정하는 이는 자신을 죽음으로 인정하는 이와 같습니다.
자기를 주님께 제물로 바치는 것이 기도입니다. 따라서 기도 때 내려오시는 분이 성령이십니다.  
 
아담과 하와는 어땠습니까? 하느님을 생명의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죽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 방법이 선악과를 바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자기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십일조를 봉헌하지 않았습니다.
스스로 생명의 주인임을 자처하려 한 것입니다. 
 
십일조는 하느님이 생명의 원천임을 인정하는 자기 봉헌이고 제사이고 기도입니다.
미사 때 이 봉헌이 없다면 그리스도를 성체로 모셔도 그분을 생명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기에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합니다.  
 
이것만이 아닙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생명으로 이끌지만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자신을 생명의 주체로 여기기 때문에 자기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타인의 생명을 먹습니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다가갈 때 그 사람이 생명의 주인을 자신으로 여기는지, 아니면 창조자로 두는지 살펴야 합니다.
아이들은 부모 덕분으로 자신이 산다고 여기는지,
아니면 자기 능력으로 자기가 살고 있다고 믿는지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아이가 부모 덕분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고 여기면 그 아이는 분명 다른 아이의 돈을
빼앗는 사람일 것입니다. 
만약 아이가 부모와 관계가 좋다면 생명까지 주신 원천이 옆에 있기에 굳이 타인의 것에 손을 뻗칠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EBS 육아학교’에서 ‘물건 뺏는 첫째, 뺏기고 우는 동생’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지민이는 언니이고 지윤이는 동생인 자매입니다. 처음에 지민이는 동생이 생겼을 때 매우 잘 대해주었습니다.
하지만 지윤이가 기어서 움직일 수 있게 되자 지민이는 지윤이의 모든 물건을 다 빼앗고
심지어 때리기까지 합니다.
엄마는 ‘둘째에게 갈 수밖에 없는 사랑에 첫째가 질투해서 그런가 보다’라고 자연스레 생각했는데, 그 정도가 너무 심한 것입니다.  
 
유아 전문가 선생은 엄마가 두 자매와 노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지민이는 지윤이가 가지고 노는 것을 다 빼앗았고, 엄마는 지윤이에게 욕심 많은 언니에게 지윤이가 양보하도록 합니다.
지금 이것은 엄마가 질서를 해치는 행위입니다. 지민이를 포기한 것입니다.
오히려 더 지윤이를 어른 취급해 주기 때문입니다.  
 
전문가 선생은 엄마에게 따끔하게 말해줍니다. 지민이를 언니로 먼저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평화를 위해서 지윤이에게 양보하게 가르치면 언니는 영원히 욕심쟁이로 남습니다.
지민이는 장난감을 빼앗긴 지윤이에게 심지어 엄마가 듣는데도 “너네 엄마 저기 있잖아!”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지윤이는 이런 지민이에게 다가가면 안 됩니다. 그에게서 흐르는 사랑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기도할 줄 모르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가 기도할 줄 모르면 자녀들은 그 부모에게서 어떤 사랑도 받지 못합니다.
오히려 피를 빨립니다.  
 
만약 지민이를 포기하고 지윤이에게 더 사랑을 주면 지윤이는 나중에 엄마에게 고마워할까요?
사랑은 흐르는 것입니다.
지민이가 엄마에게 먼저 다가오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지윤이를 위한 공간을 언니가 마련하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사랑이 모두에게 흐를 수 있습니다. 
 
언니를 그렇게 외면한 엄마가 언젠가 자신도 외면하게 될 것이라 여겨 지윤이도 결국 엄마가 주는 사랑의 부담 때문에 엄마를 좋아하지 않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누군가를 인정해준다는 말은 누군가에게 자기를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이 더 있다고 믿어주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엄마는 그것이 지민이가 아닌 동생 지윤이에게 더 있다고 믿어주었습니다.
그러면 모든 게 깨집니다.
먼저 지민이가 십자가를 질 수 있도록, 그래서 지윤이에게 엄마에게로 오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느님 아버지의 가족 안에서도 그대로 일어납니다.  
 
정은표 씨 가족 지웅이의 예를 들어볼까요? 정은표 씨는 김하얀 씨와 테니스를 칩니다.
그리고 지웅이에게 동생을 마중 나가라고 시킵니다.
지웅이는 아빠 미소로 동생을 돌봅니다.
맛있는 것도 사주고 목욕도 시켜줍니다.  
 
어떻게 중3 아이가 남동생에게 그렇게 잘할 수 있는 것일까요? 부모로부터 인정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부모가 잘한 것입니다.
지웅이를 동생의 길이고 진리이고 생명으로 삼은 것입니다.
동생은 형 지웅이를 통해 부모에게 올 수 있고 지웅이는 부모에게 가기 위해 동생을 보살핍니다.  
 
아마 정은표 씨에게는 자녀들보다 아내일 것입니다.
아내도 자녀들을 사랑하지만, 자녀들을 위해 남편에게 먼저 가야 함을 알 것입니다.
이렇게 이 가족은 사랑이 어디서부터 와서 어디로 흐르는지 잘 아는 가족입니다.
그래서 한 명도 소외되지 않고 에덴동산에 사는 것처럼 삽니다.  
 
민수기에 모세의 형인 아론과 누나인 미르얌이 모세에게 대든 적이 있었습니다.
모세가 이방인인 에티오피아 여인을 아내로 맞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아론과 미르얌은 하느님이 동생 모세에게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자신들을 통하여도 말씀하셨다고 말합니다.  
 
하느님은 이 셋을 부르십니다.
그리고 당신 사랑에는 질서가 있음을 알려주십니다. 
길을 건너뛸 수는 없는 일입니다.
하느님의 현존인 구름이 물러가자 미르얌의 피부에 나병과 같은 병이 일어났습니다.
깜짝 놀란 아론은 미르얌을 위해 모세에게 중재합니다. 모세는 하느님께 청합니다.
그러자 미르얌의 병이 낫습니다.  
 
하느님께서 이렇게 당신 사랑에 질서를 잡아주시는 이유는 모두에게 사랑이 흐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사제에게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여 사제를 무시하고 신자들끼리 주님께 은총을 청한다면 어떨까요?
주님께서 길로 지정해 준 것을 무시했기 때문에 은총보다 오히려 안 좋은 것을 받게 될 가능성이 큽니다.  
 
하느님께서 죄를 용서해 주라고 교회를 파견하셨는데, 그 교회를 무시하고 직접 예수님에게 죄를 용서받겠다고 하는 개신교의 경우를 생각해봅시다.
이렇게 되면 하느님께서 파견하신 교회를 무시하는 꼴이 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께로 가는 길입니다.
사랑은 흐름이기 때문에 질서가 있음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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