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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5월 12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홍보실 작성일 : 2022-05-12 조회수 : 1867

요한 13,16-20 
 
행복의 길: 발을 씻어주되 먼저 하느님이 되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성 만찬 때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고 그대로 실천하면 행복할 것이란 약속을 해 주십니다. 
행복이 도대체 무엇일까요? 행복은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낮아짐’이 행복이라 말씀하십니다. 
 
한 여인은 군인이었던 남편을 따라 캘리포니아 주 모하비 사막 훈련소로 가서 살게 되었습니다.
섭씨 45도를 오르내리는 지독한 무더위 속에 시도 때도 없이 모래바람이 불어 입과 눈과 음식으로 들어가기 일쑤였습니다.
뱀과 도마뱀이 우글거리지만, 주위엔 사람도 없었습니다.
몇 달 만에 우울증에 걸린 그녀는 고향 부모에게 이렇게 하소연하였습니다.  
 
“더 이상 못 견디겠어요. 차리라 감옥에 가는 게 나아요. 정말 지옥이에요.”
그러나 아버지의 답장은 이 단 두 줄만 적혀있었습니다. 
“감옥 문창살 사이로 밖을 내다보는 두 죄수가 있다. 하나는 하늘의 별을 보고, 하나는 흙탕길을 본다.” 
 
이 두 줄의 글을 받아들인 그녀는 완전히 변했습니다.
꺼리던 인디언들과 친구가 되었고 공예품 만드는 기술과 멍석 짜기도 배웠습니다.
사막의 식물들도 관찰해보니 매혹적인 것들이 많았습니다.
사막의 저녁노을은 신비한 아름다움을 선사했습니다.
그 속에서 『빛나는 성벽』(Bright Ramparts)이란 소설을 썼는데 엄청난 베스트셀러가 됩니다. 
 
델마 톰슨(Thelma Thompson)은 말합니다. 
“사막은 변하지 않았다.
내 생각만 변했다.
생각을 돌리면 비참한 경험이 가장 흥미로운 인생으로 변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이미 개미와 같은 존재가 겸손해지는 기쁨을 가질 수 있을까요?
겸손해지는 기쁨을 가지려면 먼저 높아져야 합니다.
사람이 동물에게 잘 대해줄 때 기쁜 이유는 내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하느님이 되어야 합니다.
성체가 그런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하느님으로 만드십니다.
그리고 사람의 발을 씻어주시며 그 방법으로 낮아져야 함도 알려주십니다.  
 
요한복음엔 성찬례 제정 이야기가 나오지 않습니다.
대신 성찬례의 의미를 발을 씻어주는 것으로 상징적으로 대체한 것입니다.
성체를 영하면서 삶이 이웃의 발을 씻어주는 삶이 되지 못하면 성체의 삶을 사는 게 아닙니다.
성체는 내가 양식이 되어주며 상대도 자신보다 높을 수 있음을 ‘믿어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상대를 높여주면 상대가 교만해지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상대는 겸손해집니다.
내가 상대를 겸손하게 하려고 찍어누르려 하면 상대는 교만해집니다.
당장은 겸손한 척하겠지만 뒤에서 칼을 갑니다. 상대를 겸손해지게 만들기 위해서는 상대를 한없이 들어올려야 합니다.
이 방법이 상대를 자신보다 이미 높은 사람으로 여겨주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나는 낮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낮아져서 내가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나를 힘들게 만드는 게 교만이기 때문입니다.  
 
여성 학자, 혹은 이적 엄마라고 많이 불린다는 자녀교육 멘토 ‘박혜란 작가’가 자녀들에게 한
가장 많은 말은 “알아서 커라!”입니다.
박 작가는 아이들에게 공부하란 말을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세 아들을 모두 서울대에 보냈습니다. 
 
현재 첫째는 건축학과 교수이고, 둘째 이적은 가수이며, 셋째는 방송국 드라마 PD를 하고 있습니다.
자식 농사 정말 잘 지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녀는 아이를 키우는 비법을 물을 때 이렇게 대답합니다.  
 
“아이를 키우려 하지 마라. 이것이 비법이다.”
그래도 아이들을 키운 것이 아니냐는 질문에 “제가 키웠다면 아이들이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라며 웃습니다.
『믿는 만큼 자란 아이들』이란 책의 제목처럼 어머니는 아이들을 그저 믿어주었다고 합니다.
아이들은 “엄마가 언제 우리를 키웠다고 그런 책을 내요?”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엄마는 “내가 언제 키웠다고 쓴다고 그러디? ‘난 너희들이 믿는 만큼 자라는 것을 지켜봤다’ 라고만 쓸 거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박혜란 씨는 “아이를 손님처럼 대하라”고 말합니다.
자신과 동등한 어른으로 대하라는 것입니다.
이적 씨는 어머니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저희 어머니는 저희를 애들 대하듯이 잘 안 대했습니다.” 
 
아이를 애들 대하듯이 대하면 아이는 크지 않습니다. 
비가 갑자기 올 때도 다른 아이들 어머니는 우산을 들고 아이들을 마중 온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적 어머니는 한 번도 오신 적이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서운했을까요? 그는 뿌듯했다고 합니다.
자신을 어른으로 대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친구들과 비를 맞으며 장난치며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러며 이런 것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아, 한 번 젖으면 더는 안 젖는구나!” 
 
엄마가 사회생활을 하게 되었을 때 고3 막내아들 도시락을 싸 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형들은 대학생이니 늦게 일어나고 엄마는 외국에서의 삶으로 바쁘니 막내가 일찍 일어나 형들 먹을 밥을 해 놓고 자기 도시락을 싸서 학교에 다녔다고 합니다.
막내는 제가 고3인 것과 어머니와 무슨 상관이냐며 외국에 가서 일 보시라고 말해주었다고 합니다.  
 
정말 이해가 안 되는 어머니입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어머니를 사랑합니다.
어머니가 자신들을 언젠가는 떠나보내야 하는 독립적인 존재로 믿어준다는 것이 바로 자녀를 이용하여 자기 만족을 챙기려는 이기적인 마음을 죽인 피 흘림인 것을 압니다.
이 피 흘림으로 자녀들의 자아의 발꿈치가 닦여지는 것입니다.  
 
이적(이동준) 씨가 중3 때 ‘엄마의 하루’란 제목으로 이런 시를 썼습니다. 
“습한 얼굴로, am 6:00이면, 시계같이 일어나, 쌀을 씻고, 밥을 지어, 호돌이 보온 도시락통에 정성껏 싸, 장대한 아들과 남편을 보내놓고, 조용히 허무하다. 
 
따르릉 전화 소리에, 제2의 아침이 시작되고, 줄곧 바삐, 책상머리에 앉아, 고요의 시간은, 읽고 쓰는데, 또 읽고 쓰는 데 바쳐, 오른쪽 눈이 빠져라, 세라믹 펜이 무거워라, 지친 듯 무서운 얼굴이, 돌아온 아들의 짜증과 함께, 다시 싱크대 앞에 선다. 
 
밥을 짓다, 설거지를 하다, 방바닥을 닦다, 두부 사오라 거절하는, 아들의 말에, 이게 뭐냐고 무심히 말하는, 남편의 말에, 주저앉아 흘리는 고통의 눈물에, 언 동태가 되고, 아들의 찬 손이 녹고, 정작 하루가 지나면, 정작 당신은, 또 엄마를 잘못 만나서를 되뇌시며, 슬퍼하는. 
 
슬며시 실리는, 당신의 글을 부끄러워하며, 따끈히 끓이는, 된장찌개의 맛을 부끄러워하며, 오늘 또, 엄마를 잘못 만나서를, 무심한 아들들에게, 되뇌이는.
‘강철 여인’이 아닌, ‘사랑 여인’에게, 다시 하루가 길다.” 
 
엄마는 해 준 게 없다고 여기지만 자녀는 압니다.
자신을 믿어주는 것만큼 피를 흘리는 사랑은 없다는 것을.  
 
진정 믿어주는 만큼 자랍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내 살을 깎아내는 아픔이 따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동물처럼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자녀로 살아갈 수 있음을 믿어주셨습니다.
그 믿음의 표징이 바로 당신의 살과 피입니다.
당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면 하느님처럼 순결하고 거룩하고 능력자로서 살아갈 수 있음을 믿게 됩니다. 
 
자녀들을 어른으로 대하고 믿어줄 때 어른으로 자랄 수 있는 것처럼, 예수님은 지금 제자들을 하느님 대하듯이 대하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당신이 낮아지고 그 낮아짐으로 당신이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믿어야 합니다.
이웃을 이미 하느님이 된 존재로 믿어야 합니다.
믿고 정말 하느님이 되는지 바라보면 됩니다. 이것이 가장 큰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 믿어줌으로써 내가 피 흘리고 낮아지기 때문에 나는 행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겸손하니 모든 것에 감사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내가 이웃을 하느님으로 대하며
자신도 하느님처럼 되어가는 성체의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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