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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5월 7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홍보실 작성일 : 2022-05-07 조회수 : 1792

요한 6,60ㄴ-69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표징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의 특징은 말씀과 머물기를 거북해하는 것 
 
 
한 신사가 꽃가게 앞에 차를 세웠습니다.
멀리 고향에 계신 어머니께 꽃다발을 보내 달라고 주문을 할 참이었습니다.
신사는 가게로 들어가려다 말고 한 소녀가 길가에 앉아 울고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신사는 소녀에게 다가가 물었습니다. 
“아니, 얘야. 왜 여기서 울고 있니?”
소녀는 울먹이며 말했습니다. 
“엄마한테 드릴 장미 한 송이를 사고 싶은데, 돈이 모자라요.”
신사는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래?” 
 
신사는 소녀의 손을 잡고 꽃가게로 들어가 어머니에게 보낼 꽃다발을 주문한 뒤 소녀에게
장미 한 송이를 사 주었습니다. 
소녀의 표정이 환하게 바뀌었습니다. 
 
가게를 나오면서 신사는 소녀를 집까지 데려다 주겠다고 제의했습니다.
“정말 데려다 주실 거예요?” “그럼.” “그럼, 엄마한테 데려다 주세요. 저... 아저씨, 그런데 엄마 있는 곳이 좀 멀거든요...” 
 
“하하, 이거 내가 너를 괜히 태웠구나.” 신사는 소녀가 안내하는 대로 차를 몰았습니다.
한참을 달려 시내 큰길을 빠져나가 꼬불꼬불 산길을 따라 간 곳은 뜻밖에도 공동묘지였습니다. 
 
소녀는 만든 지 얼마 되지 않은 무덤가에 꽃을 내려놓았습니다.
한 달 전 돌아가신 엄마 무덤에 장미 한 송이를 바치려고 먼길을 달려왔던 것입니다. 
 
신사는 아이를 집까지 바래다 준 뒤 꽃가게로 돌아가 어머니께 보내기로 한 꽃을 취소했습니다.
그리고 꽃을 한아름 산 뒤 다섯 시간이나 떨어진 어머니의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TV동화 행복한 세상 1, 장미 한 송이] 
 
저도 어버이날을 맞아 부모님과 저녁식사를 했습니다.
조금 일찍 끝났지만 피곤해서 빨리 집에 오고 싶은 마음에 부모님을 내려드리고 곧바로 집으로 향했습니다. 
‘조금 더 함께 있어 드릴 걸...’ 하는 마음이 마음을 불편하게 하였습니다. 
 
참으로 좋다면, 사랑한다면 함께 머무르려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의 말씀이 귀에 거슬려 떠나가는 부류가 있는가 하면, 역시 무슨 말인지 모르면서도 끝까지 남아있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당신 성체성혈의 신비에 대해 말씀하시는 마지막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설명해 주셨는데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거북해 합니다.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은 거북해서는 안 됩니다. 
꿀과 같이 달아야 정상이 아니겠습니까?
하느님은 에제키엘 예언자에게 말씀이 적힌 두루마리를 먹으라고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배를 채우라고 하였습니다.
에제키엘 예언자가 그것을 먹으니 입에 꿀처럼 달았다고 합니다(에제 3,3). 
 
요한에게도 천사에게서 두루마리를 받아 삼켰는데 입에는 꿀처럼 달았다고 합니다(계시 10,10).
즉 말씀은 꿀같이 단 것입니다. 
그 안에 진리의 단 맛이 있고, 그 진리가 나를 자유롭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오늘 복음에서 대부분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이 진리의 말씀을 듣고 다 떠나가게 된 것일까요? 
 
“이 말이 너희 귀에 거슬리느냐? 영은 생명을 준다. 
그러나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 
 
예수님은 인간이 ‘육적’으로 되어버렸기 때문에, ‘영적’인 것에는 관심도 받아들이려고 하는 마음도 없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표징은 영적인 것이 육적인 것과 결합된 것입니다. 
표징은 사실 더 완전해지면 성사라고 하는데, 지구상에 존재하는 가장 완전한 표징이요 성사가 바로 ‘성체’입니다. 
 
성체는 육적으로는 밀떡입니다. 
그 밀떡만 보는 이들에게는 성체가 빵 외에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러니 이 세상에 육적으로 사는 사람들이 그것에 관심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 성체, 즉 구원을 두고도 오려고 하지도 않고 왔다가도 떠나가고 마는 것입니다. 
 
성찬의 전례 앞에 항상 말씀의 전례가 앞섭니다. 
왜냐하면 말씀으로 가슴이 뜨거워져야
더 영적인 사람이 되어서 그 밀떡 안에 있는 영적인 면, 즉 그리스도의 존재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성경을 가슴 뜨겁게 풀이해 준 이유입니다. 
 
다시 말하면 말씀에 흥미가 없다면 이미 그 사람은 육적인 사람이고 그래서 성체를 영하더라도
그리스도의 몸보다는 밀떡을 영해 그에게 아무런 이득도 주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구원받을 수 있는 존재인지 그렇지 않은지는, 내가 말씀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보면 됩니다. 
 
말씀이 꿀처럼 달아서 하루라도 말씀을 읽지 않고 묵상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구원을 확신해도 좋습니다. 
이미 영적인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듣는 것이 너무 거북하고 어려워서 누구에게 강요받지 않는 이상 억지로 말씀을 찾아 읽고 묵상하고 배우려 하지 않는다면 내 자신이 육적인 인간이 되어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육적인 인간에서 영적인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말씀에 맛 들여야 합니다.
처음 무엇에 맛 들인다는 것은 조금은 고생을 각오해야 합니다.
그렇더라도 오늘 예수님을 떠나간 사람들처럼 되지 않기 위해 우리는 오늘 복음의 사도들처럼
무슨 의미인지는 몰라도 그 분 안에 진리가 있음을 믿고 끝까지 참고 ‘머물려는 마음’을 가질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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