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6,52-59
우리는 성체로 ‘말미암아’ 살아가는가?
예수님은 계속 ‘생명의 빵’에 대해 설명하십니다.
당신 살과 피를 먹고 마신 사람들만 영원히 살 것이라 약속하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당신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당신으로 말미암아 살 수 있다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살과 피를 먹고 그 살과 피를 먹은 이 덕분으로 살아간다는 말을 먼저 이해해야 합니다.
영화 ‘아이, 로봇’(2004)은 공상과학 영화이지만 인간과 로봇을 교묘하게 교차시키며
‘인간도 로봇과 같지 않을까?’, 혹은 ‘로봇도 인간과 같지 않을까?’란 섬뜩한 메시지를 전달해줍니다.
로봇이 자유의지를 가져서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되면 세상이 어떻게 될까요? 결론은 이것입니다.
‘로봇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생존에 대한 문제를 제외하고는.’
2035년, 로봇의 원칙은 1. 인간을 해치지 않는다. 2. 인간의 명령에 따른다.
3. 이 두 법칙에 위배되지 않으면 스스로 보호한다. 이렇게 3가지다.
인간의 생활 전반에 인공지능 발달된 로봇과 생활을 한다. NS-4가 단종되고 NS-5 모델이 출시되려는 시기다.
그런데 이 모델의 개발자 래닝 박사가 자살을 한다.
시카고 경찰인 델은 AI 로봇을 적대시하는데 과거 애인과 사고를 당했을 때 로봇이 명령을 어기고
자신만 구해 애인이 죽었던 사건 때문이다.
그는 래닝이 살해당했을 거라 생각한다.
그리고 래닝이 개발한 모델 NS-5는 인간의 명령과 관계없이 자율적으로 판단하는 모델이라 로봇의 3대 원칙이 지켜지지 않았을 수도 있어 불안해한다.
NS-5 써니도 인간처럼 꿈을 꾸고 감정을 느낀다. 델은 수잔과 써니의 심리 검사를 하는데 나쁜 AI는 아니라 나와도 델은 써니가 래닝을 죽였을 거라 생각한다.
수사를 하던 델은 습격을 받고 래닝 사건은 자살로 수사가 종결된다.
써니는 델을 피해서 NS-5 공장에 숨는다.
써니는 왜 래닝 박사가 자기를 만들었나 궁금해한다.
써니는 자기가 꾼 꿈 얘기도 해준다.
대화를 나누며 써니를 신뢰하게 된 델은 써니가 알려준 곳으로 가는데 컨테이너 박스에 NS-4들이 숨어 살고 있는 곳이었다.
이들은 NS-5 모델에 의해 제거되고 있었다.
델은 사건을 파헤칠수록 의문의 로봇들에게 공격을 받고 로봇의 반란을 예상해서 써니를 없애려던 사장과 얘기해보려고 찾아간다.
로봇들의 반란의 배후가 궁금했지만 이미 사장은 죽어 있었다.
그런데 로봇의 반란은 메인 컴퓨터 비키가 조종해 반란을 일으키고 있었고 이를 막으려고 델은 수잔과 바이러스를 심으려고 한다.
비키의 반격으로 죽을 위기에서 겨우 비키를 제거한 델, 수잔은 반란을 막았지만, 사람들이 AI 로봇을 폐기하려 한다.
써니는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는데 델은 마음대로 해보라면서 자유를 준다.
써니는 버려진 로봇들이 있는 곳으로 가고 인간들의 명령에서 벗어나서 이 로봇들은 써니의 지도 아래 자유롭게 자신들의 왕국을 만든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요한 6,56-57)
여기서 사용하는 누구를 “말미암다”라는 단어는 ‘디아’(dia)라는 전치사는 “~을 통하여”, 혹은 “~ 덕분으로”란 뜻의 전치사입니다.
다시 말해 당신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살 가능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통로가 막히면 들락거릴 수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에게 조종당하는 존재입니다.
그 조종 당하는 방법은 나를 만든 이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살은 행동 강령이고 피는 에너지라 생각해도 될 것입니다.
처음부터 에너지를 지니고 자유의지를 지닌 존재는 ‘신’(神)밖에 없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또 왜 그렇게 살아야 하는지 그 이유를 살과 피로 알려주지 않으면
인간은 살 의미를 잃습니다.
여기 인간의 못된 야심으로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한 한 불쌍한 인간이 있습니다.
아니, 두 사람입니다.
한 하체에 두 상체가 달린 샴쌍둥이입니다.
마샤와 다샤 자매는 1950년 러시아 모스크바 산부인과에서 샴쌍둥이로 태어났습니다.
이들의 비극은 어머니 품에서 아이를 떼 자신의 실험 도구로 사용한 한 과학자에게서 시작되었습니다.
소련의 생물학자인 표트르 박사였습니다. 표트르 박사는 어머니에게는 아이가 사산했다고 말하고는 아이를 감금하여서 한 아이를 찌르면 다른 아이도 아픈지, 한 아이에게만 음식을 주면 다른 아이는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등을 실험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언니 마샤는 긍정적인 편이었고 동생 다샤는 자주 자살 시도하였습니다.
40년 만에 실험실 쥐처럼 사는 삶에서 자유를 얻었지만 어찌 살아야 할 이유를 몰랐습니다.
자유는 오히려 이들을 더 고통스럽게 만들었습니다.
2003년 동생 다샤는 심장마비로 사망합니다. 언니 마샤는 몸을 분리하는 수술을 하면 살 수 있었지만 동생과 함께 죽음을 맞이하는 것을 선택합니다.
동생과 한 몸으로 살며 동생을 돌보는 것을 하지 않는다면 더는 살 이유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겐 진정한 의미에서의 자유가 없습니다. 인간의 폄하하고 존엄성을 깎아 먹는 발언이 될 수는 있지만 인간은 누구로 ‘말미암아’ 사는 존재입니다.
지금 대부분 우리는 부모와 학교에서 자라면서 누군가의 살과 피를 먹었고 그들 덕분으로 살고 있습니다.
그들의 뜻이 우리 안에 들어와 우리는 그 뜻을 실현해주며 사는 것입니다.
그분들의 뜻이 옳았음을 증명하며 사는 게 우리 인생입니다.
존재할 때부터 삶의 의미나 뜻, 나 자신으로 산다는 것의 의미를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나 자신으로 산다는 사람도 결국엔 다 누군가에게서 들은 것을 증명하는 것뿐입니다.
우리 자신으로 산다는 말은 그저 태어날 때의 생존본능(물론 이것도 창조자가 넣어준 것이기는 하지만)으로 모기나 기생충처럼 산다는 말을 의미합니다.
우리 자신 안에서 스스로 생존의 의미와 방법이 솟아나지 않습니다.
사회생활이 가능한 모든 동물은 결국 부모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 그들의 삶을 대신 살아주며
무리생활이 가능할 정도로 성장하게 됩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면에서 하느님 나라의 하느님 자녀들도 그렇게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느님이 주시는 살과 피를 먹고 그분을 살게 해 드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야 그분 나라에 살 수 있는 모습으로 새로 태어납니다.
인간은 창조자가 아닙니다. 피조물입니다.
모든 피조물은 창조자의 의지 없이 스스로의 자유의지로 사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으로 사는 게 뭐가 좋습니까? 모기가 될 뿐입니다.
창조자로 삽시다.
창조자로 사는 방법은 창조자를 아버지로 여겨 그 본성이 나를 통해 흐르게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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