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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5월 4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홍보실 작성일 : 2022-05-04 조회수 : 1866

요한 6,35-40 
 
나는 주님께서 맡겨주신 사람에게만 생명의 빵이 된다 
 
 
예수님은 당신을 “생명의 빵”이라고 소개하십니다.
생명의 빵은 창조자의 모습입니다.
나를 희생하여 누군가를 살리는 존재란 뜻입니다. 그리스도는 당신이 ‘창조자’라고 소개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은 두 양식으로 나뉩니다. 하나는 피조물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창조자 방식입니다.
피조물은 모기처럼 이웃을 생존을 위한 수단으로 여기고 창조자는 이웃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빵으로 내어줍니다.  
 
그런데 내가 피조물로 살 것인가, 창조자로 살 것인가는 내가 만나는 사람을 내가 어떤 모습으로
대하느냐에 의해 결정됩니다.
이웃을 창조자 하느님이 나에게 맡겨주신 사람으로 보는지, 아니면 내가 선택한 사람으로 보는지에 달려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제자들이나 당신에게 오는 이들이 당신이 아닌 아버지께서 보내주신 사람들이라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시는 사람은 모두 나에게 올 것이고, 나에게 오는 사람을 나는 물리치지 않을 것이다.”(요한 6,37)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의 이웃을 대하는 방식을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웃을 아버지께서 당신에게 보내주신 이들이라 여기십니다.
다시 말해 내가 선택한 이들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보내주신 이들로서, 이웃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기 위한 대상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명의 빵이 되시는 것이고 영원한 창조자의 생명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미국의 가장 혐오스러운 유튜버가 있습니다. 구독자 300만이 넘는 유명한 유튜버지만
그는 인기와 돈을 얻기 위해 자신을 혹사하고 있습니다.
니코카도 아보카도라는 이 유튜버는 처음에 채식주의자들을 위한 시식 장면을 방송했습니다.
가끔 바이올린도 켰습니다.
하지만 그런 맹맹한 방식으로는 구독자를 모을 수 없었습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하는 것은 ‘자신이 모으려 했다’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기임을 입증합니다.
그리스도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모든 사람을 하느님께서 맡겨주시는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생명의 빵이 되신 것입니다.
그러나 구독자를 모으려 한다는 것은 생존을 위해 음식을 모으는 피조물의 모습입니다.  
 
어쨌거나 아보카도는 작전을 바꿔 친구와 함께 아보카도 1만 칼로리를 폭식하는 동영상을 내보냈고 엄청난 구독자 수의 증가를 가져옵니다.
그래서 이제는 지금까지 유지하던 채식주의를 포기하고 인스턴트 식품을 폭식하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그것도 안 되니 음식으로 엽기적인 행위를 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구독자 수가 엄청나게 증가했지만, 댓글 대부분은 이제 악플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엽기적인 행위를 멈출 수가 없게 되어버렸습니다.
그는 비싼 집에 사는 영리치가 되었지만, 산소호흡기까지 쓰며 생활해야 할 정도로 몸을 망가뜨렸습니다.
심지어 산소호흡기를 끼고 먹는 방송을 합니다. 죽음으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피조물로 사는 사람의 운명입니다.  
 
우리는 창조되었음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다른 이들도 창조된 피조물들이 됩니다.
주인이 계시지 사람을 만날 때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만납니다.
이웃이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창조자 본성에 참여하게 도와주는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생명의 빵이 됩니다.
생명의 빵은 창조자로서 영원히 삽니다.  
 
하루는 떡볶이 가게에 한 아저씨가 찾아와 떡볶이 500원어치만 달라고 청합니다.
아주머니는 돈이 없어 보이는 아저씨를 위해 떡볶이를 푸짐하게 주었고 
 
“아저씨, 배고프시면 아무 때나 오세요”라고 하였습니다. 
 
그 이후로 아저씨는 정말 아무 때나 와서 아무 말 없이 당연한 듯 떡볶이를 먹고 계산하지 않고 그냥 나가버렸습니다.
이렇게 공짜로 드리는 떡볶이 값은 매달 약 70만 원이었습니다.
아주머니는 그냥 먹고 나가는 그 아저씨에게 무려 8년 동안 그렇게 떡볶이를 제공해주었습니다.  
 
이 아주머니는 사람을 대하는 자세가 피조물일까요, 창조자일까요? 당연히 창조자의 마음가짐을 가졌습니다.
돈을 벌고 싶은 것이 아니라 창조하고 싶은 것입니다.
이것은 아저씨를 대하는 자세에서 드러납니다.
제작진은 묻습니다. 
“사람을 돕는 게 사실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억지로 했다면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주머니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아, 그냥 쉬웠어요. 오시면 드리기만 했으니까요.” 
 
아주머니는 ‘떡볶이 천사’라는 별명이 붙었다는 말에 이렇게 대답합니다. 
“어떻게 사람이 천사일 수가 있겠어요. 저는 그런 분들을 많이 도와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그분들이 자립할 수 있을 때까지 누군가의 도움이 있어야 일어나니까요.” 
 
현재 그 남자는 지자체 복지팀의 도움으로 정신과 병원에 입원 치료 중입니다.
그리고 아주머니는 그 남자가 이번 달 말일쯤 의사 선생님의 결정으로 퇴원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작진이 물었습니다.  
 
“만약 그분이 퇴원하셔서 다시 당연한 듯이 요구할 수도 있잖아요?”
“드려야죠. 그런 마음은 늘 갖고 있어요. 왜냐하면 부자나 권위가 있고 그런 분들한테는 순종이 쉽지만 이렇게 낮은 곳에 계신 분들한테는 무시하거나 이런 부분들이 많잖아요. 
말 한마디라도 따뜻하게 하는 그런 삶을 살면…. 그런 분들을 통해 낮아지고 그분을 통해서 순종하는 법을 배웠어요.” 
 
“낮아지고 순종하는 법”을 당연한 듯 무전취식 하는 아저씨를 통해 배운 것입니다.
이는 자신도 피조물임을 믿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인간이 자녀를 키울 수 있는 이유는 부모가 자신을 키웠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받아야 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창조자가 있다는 사실은 자녀뿐만 아니라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까지 창조자의 사랑을 할 줄 아는 이런 분들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사람을 만날 때 창조자가 맡겨주신 사람으로 여길 수 있다면 우리도 생명의 빵이 될 수 있습니다.
창조자가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피조물은 죽지만 창조자는 영원히 삽니다.
나에게 있는 것을 내어주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주는 창조자는 그 생명이 마를 수 없음을 증명합니다.  
 
우리도 창조되었음을 믿읍시다.
그래야 사람들을 피조물로 보고 내가 창조된 그 창조의 소명을 다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아버지께서 맡겨주신 창조의 대상으로 여기십니다.
그리고 당신을 창조된 피조물로 여기기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시는 사람은 모두 나에게 올 것이고, 나에게 오는 사람을 나는 물리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왔기 때문이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요한 6,37-39) 
 
자신을 피조물이라고 여기는 사람만 창조자가 되고 생명의 빵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습니다.
창조자만이 영원합니다.  
 
우리가 저절로 생겨났다고 믿어서 좋을 게 무엇이겠습니까? 생존에 집착하며 살 수밖에 없습니다.
어차피 다 죽습니다.
창조자로 살아보는 것은 어떨까요? 그러려면 나도 창조되었음을 믿고 내가 만나는 사람을 하느님께서 맡겨주셨다는 믿음을 잃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사람은 내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맡겨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께 맡겨주신 이를 하나도 잃지 않으시려는 마음으로 사셨습니다.
우리도 생명의 빵으로 영원히 살려면 내가 만나는 이웃을 주님께서 살리라고 보내주신 선물로 여겨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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