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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5월 3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홍보실 작성일 : 2022-05-03 조회수 : 1993

요한 14,6-14 
 
‘부족하기에’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길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길’이시라는 말씀은,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라는 말로 설명이 됩니다. 
 
예수님을 통해야만 아버지께 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진리’는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라는 말씀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생명’은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이신 그리스도보다 더 큰 일을 하게 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바로 하느님의 본성, 곧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예수회 정제천 신부님은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우리나라를 방문하셨을 때 통역을 맡으셨던 분입니다.
이분이 사제가 되도록 이끌어 주신 분을 이분은 그리스도라 확신하십니다. 
 
광주 민주화 운동이 터졌을 때 이분은 우선 출세와 정의 중, 어떤 편에 서야 할지를 결정해야 했습니다.
당시 군부 독재와 그 군부 독재를 지지하는 지식인층, 그리고 이를 묵인하는 시민들이 있었습니다.
정제천 신부는 그들 부류에는 들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출세는 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사법고시를 준비하는 중에 “내가 왜 사는가?”라는 문제는 짚고 넘어가고 싶었습니다.
이것을 알지 못하고 산다면 60, 70세가 되어도 인생이 허무할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이상한 환시 같은 것을 봅니다.
기차를 타고 가는데 옆자리에 앉아있는 누군가가 창밖의 노을을 가리키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제천아 봐라. 저것이 인생이란다”라고 말해주었습니다.  
 
누구인지 보이지는 않았지만, 이분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불교, 개신교, 천주교를 이리저리 공부한 후에 세례를 받지 않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사제까지 된 것입니다.  
 
시간이 많이 흘러서 교황님과 함께 헬기를 타고 오는 도중에 석양의 노을이 아름답게 물들어 오고 있었습니다.
그때 정 신부는 교황님께 노을이 아름답다고 말했고, 교황님은 그 노을을 보며 예수회에서 살다가 간 위대한 성인들을 떠올리며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합니다.
정 신부는 그리스도께서 여기까지 자신을 이끌어 주신 분이 그리스도라고 확신한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십니다.
영원한 생명으로 이끄시기 위해 참 진리의 삶을 선택하는 길이 되어주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왜 정 신부에게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완전히 드러내지 않으셨을까요?
만약 그랬다면 정 신부는 그때 노을보다도 그리스도라는 존재에 압도되어 온전한 길을 가지 못했을 것입니다. 
 
진리와 생명으로 이끄는 분은 항상 도달한 분이 아니라 ‘도정’에 있는 분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부담 없이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인간이 되신 이유이고
직접 그 길을 가시며 우리에게 보여주신 이유입니다.  
 
이태석 신부를 생각해봅시다.
얼마 전 이태석 신부의 제자인 토마스가 의사가 되어 유퀴즈에 나온 적이 있습니다.
이태석 신부는 토마스에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었습니다.
신부님은 토마스에게 그리스도께 가는 길이었고, 그리스도의 삶의 계시였으며, 또 그리스도의 생명을 전해주었습니다.  
 
물론 히틀러와 같은 반대 경우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히틀러는 폭력적인 아버지 밑에서 자랐습니다.
히틀러의 아버지, 알로이스 히틀러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었습니다.
아니, 길이고 거짓이고 죽음이었습니다.
알로이스는 술을 좋아하고 권위주의적이었으면 난폭했습니다. 
 
아이를 열등감의 길로 가게 만들어 그리스도가 아닌 거짓된 진리를 드러냈고 결국엔 자살로 이르게 하였습니다.
히틀러가 훗날 독일 수상이 되고 비서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나는 아버지의 매일같이 계속되는 매질 속에서 더 이상 울지 않게 되었으며, 나중에는 나의 인내심을 시험하며 조용히 매질의 회수를 새어 나갔다.”
중요한 것은 우리는 누구나 원하든 원하지 않든 ‘자신이 향하는 방향으로 누군가의 길이 되어준다’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려면 나는 항상 그리스도의 십자가 삶을 지향하고 있어야 합니다. 
『꽃들에게 희망을』은 그 좋은 예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간단한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줄무늬 애벌레는 다른 애벌레들이 하는 것처럼 살아갑니다.
알에서 태어나서 나뭇잎을 먹으며 몸집을 불립니다.
그리고 남들이 하는 것처럼 애벌레 탑을 올라갑니다.
경쟁에 뛰어든 것입니다.
거기에서 노랑 애벌레를 만납니다.
둘은 경쟁에서 잠시 떨어져 사랑에 빠집니다.  
 
하지만 줄무늬 애벌레는 탑의 꼭대기에 무엇이 있는지 궁금하였습니다.
그래서 다시 탑을 오릅니다.
노랑 애벌레는 나뭇가지에 매달린 위태로워 보이는 한 애벌레를 만납니다.
그는 고치를 만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노랑 애벌레에게 그 고치를 만들고 있던 애벌레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어줍니다.
그는 말합니다.  
 
“나를 보렴. 나는 지금 고치를 만들고 있단다.
내가 마치 숨어 버리는 듯이 보이지만, 고치는 결코 도피처가 아니야.
고치는 변화가 일어나는 동안 잠시 들어가 머무는 집이란다. 고치는 중요한 단계란다.
일단 고치에 들어가면 다시는 애벌레 생활로 돌아갈 수 없으니까.
변화가 일어나는 동안, 고치 밖에서는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나비는 이미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란다.
다만 시간이 걸릴 뿐이야!”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노랑 애벌레에게 나비에 대해 말해줄 수 있는 대상은 나비가 아니라 나비가 되어가는 과정에 있는 같은 애벌레라는 것입니다.
나비는 애벌레와 말이 통하지 않습니다. 
설사 말이 통한다고 하더라도 믿지 못할 것입니다. 
 
변화의 과정에 있는 자라야만, 곧 내가 십자가를 통해 그리스도께 가고 있는 사람이어야만
그 사람을 이미 나비가 되신 그리스도께 초대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를 파견하신 이유입니다.
당신이 직접 우리에게 나타나서 하느님처럼 될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보다, 예수님처럼 물 위를 부족하게나마 걸어본 베드로가 말하는 것이 우리에겐 더 설득력이 있습니다. 
 
이태석 신부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이태석 신부가 되어 사는 것보다
이태석이 예수님의 모습으로 살려고 하는 모습이 토마스에겐 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일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어디론가 향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누군가의 길입니다.
하지만 내가 진리로 가고 있는지, 거짓으로 가고 있는지 살펴야 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몸을 가리며 거짓으로 향했습니다. 진리는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있는 그대로 말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진리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나를 거짓으로 이끄는 것은 죽음입니다.
거짓이 없으면 그 사람을 통해 진리가 우리를 생명으로 이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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