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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5월 1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홍보실 작성일 : 2022-05-01 조회수 : 1864

요한 21,1-19 
 
자신을 낮추는 것은 겸손이 아니라 거짓말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세 번째 나타나십니다.
제자들은 모두 일곱 명이었습니다.
숫자 ‘7’은 성령을 상징하기도 하고, 일곱 개의 성사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그러니 그 배는 7성사로 ‘하느님의 자녀들’(히브리어로 ‘하느님의 자녀들’의 숫자 값은 ‘153’)을 잡는 교회를 상징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어떻게 교회에 부활하신 당신 자신을 나타내 보이시는지 말해줍니다.  
 
예수님은 새벽에 나타나셔서 밤새 허탕을 친 제자들이 많은 물고기를 잡게 하십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제자들이 그분이 누구신지 모르면서도 그분 말에 순종하였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을 마치 예수 그리스도처럼 크게 볼 줄 아는 겸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겸손은 자아의 죽음입니다.
내 주인을 죽였으니 참 주인이신 ‘나는 나’이신 분을 받아들일 준비가 완벽히 된 것입니다. 
성모님의 겸손이 그 모범이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겸손이 자신을 낮추는 것으로 여깁니다.
사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낮추는 것은 겸손이 아니라 자신이 바라보는 자신을 속이는 일입니다.
나는 그냥 있는 그대로의 나입니다.  
 
한 번은 제가 자아를 죽여야 한다고 말할 때 어떤 분이 신학교에서는 그렇게 가르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저보다 더 공부한 많은 신학자가 있는데 그들이 전부 틀렸고 저만 맞았다는 말이냐고 다그쳤습니다.
저는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그분은 무서운 눈초리로 이렇게 꾸짖었습니다. 
“이런, 교만한….” 
 
또 어떤 신부님은 “한 분이신 하느님을 저는 믿나이다”라는 말에 대해 하느님은 한 분이 아니라 세 분이신데 한 하느님이라고 말한 것에 대해 “그럼 우리가 신학생 때 배운 게 잘못됐단 말이야?”라고 소리치셨습니다.  
 
왜 우리는 우리 생각을 있는 그대로 말하면 교만한 것이라 말할까요?
자신을 낮추고 무조건 자신이 틀렸다고 해야 할까요? 
 
초등학교 때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라는 것을 외우며,
‘내가 우리 민족을 중흥하기 위한 목적으로 태어난 것이란 말이야?’라는 말을 했지만 아무도 긍정해주지 않았습니다.  
 
물론 혼자 맞는다고 주장하면 교만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진실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지만, 세상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겸손이 아니라 거짓말하는 것입니다.  
 
겸손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겸손은 나를 낮추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높이는 것입니다.  
 
성 크리스토포로는 힘이 세고 덩치가 큰 장사였습니다. 성인은 자신보다 힘이 센 사람이 나타나면 그를 주인으로 섬기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처음에는 왕을, 그다음에는 악마를 찾아갔습니다.
악마가 십자가를 보고 도망치는 것을 보자 그는 그리스도가 가장 힘이 센 분일 것으로 생각하고
그를 찾아 헤매었습니다.  
 
그러던 중 한 은수자를 만나게 되었는데, 은수자는 성인에게 가난한 사람들을 섬기는 일이 곧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라며 강가에 머물며 가난한 여행자들을 건네주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에 따라 성인은 강가에서 돈이 없어 배를 타지 못하는 순례자나 여행객들을 어깨에 올려 태우고 건네주는 일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어린아이를 어깨에 앉히고 강을 건너게 되었는데 물속으로 들어갈수록 아이가 점점 무거워지기 시작하더니 물살은 더욱 거세져 마침내 강을 건널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성인이 “너무 무거워 마치 세상을 짊어진 것 같구나!”라고 하자 어깨에 앉은 어린아이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두려워 마라. 너는 세상뿐만 아니라 세상의 창조자를 짊어지고 있다. 내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다!”
성인의 원래 이름은 레프로보스였지만 그리스도를 업는다는 의미로 크리스토포로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사실 이 이야기는 성인이 자신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존재였다가 어린아이조차 제힘으로 업을 수 없는 약한 존재임을 자각해나가는 이야기라 할 수 있습니다.
겸손해지려면 약한 척을 하는 것이 아니라 더 강하고 큰 사람을 만나야 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세 번이나 당신을 배반한다는 말에 콧방귀도 안 뀌었습니다.
자기 생각이 옳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크심 앞에서 작아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이 관상입니다.
하느님의 엄위를 본다면 내가 먼지처럼 작아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겸손도 혼자 힘으로 작아지려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만나야만 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본인이 주님을 뵐 수 있다고 여기는 사람에게는 주님은 절대 나타나지 않으십니다.
주님과 가까워질수록 그분의 크심에 나는 끊임없이 작아지기 때문입니다.
성인들이 영성의 진전을 위해 끊임없이 세상 것으로부터의 이탈과 겸손을 강조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제가 오래전 처음에 설악산 권금성에 올라갔을 때 그 놀라운 광경에 신이 나서 절벽 끝을 뛰어다니다시피 하였습니다.
기껏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와서 산을 정복했다고 느낀 것입니다.
산이 나의 발아래 있었습니다.
그러다 바람이 불어와 옷이 부풀었고 자칫 바람 때문에 날려 낭떠러지로 떨어질 뻔하였습니다.
그때 저 자신의 작음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설악산은 나의 발아래 있었습니다.  
 
몇 년 뒤 사제가 되어 다시 그곳에 올라왔을 때는 기분이 달랐습니다.
저는 한 발짝만 뒤로 가면 목숨을 부지할 수 없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습니다.
산이 커지니 내가 작아졌습니다.
그런데 왜 산이 커졌을까요? 주님이 만드신 것이란 믿음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주님께 대한 믿음이 성장하니 내가 바라보고 있는 모든 것은 주님 창조 일부분이었습니다.
주님 때문에 산이 커진 것입니다.  
 
겸손은 고양이가 쥐인 척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자 앞에 서는 것입니다.
겸손은 내가 작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겸손은 비법은 이것입니다.
내가 작아지려 하지 말고 내 주위에 있는 것들, 사람들의 크기를 키우는 것입니다. 
 
무대공포증도 마찬가지입니다. 떨지 않으려고 연습을 죽도록 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청중을 하느님으로 보고 압도당해버리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하느님!”이란 기도를 계속 바칠 필요가 있습니다.
이 기도를 바치다 보면 혼자 있을 때는 주님 안에서 존재하게 되고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는
주님의 창조 능력 안에 머물게 됩니다. 어쨌건 사자 앞의 고양이가 됩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의 목소리에 순종하게 되고 그 사람이 곧 예수 그리스도가 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겸손의 노력은 참 그리스도를 뵈옵는 관상으로 이끌어 줍니다.
주님은 가장 작은 이를 통해서도 나에게 오른쪽으로 그물을 던지라고 요구하십니다.
우리에게 요구되는 영성의 유일한 지향점은 그분의 커지심과 나의 작아짐입니다.  
 
처음 베드로가 오른쪽에 그물을 던져 많은 물고기를 잡았을 때 베드로는 예수님보고 자신을 떠나달라고 청하였습니다. 
자신이 더 이상 작아지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 뛰어갑니다.
겸손해지는 맛을 알았기 때문이고 예수님 아니면 겸손해질 수 없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나를 진정으로 겸손하게 하실 수 있는 분은 온 우주의 창조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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