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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4월 10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홍보실 작성일 : 2022-04-10 조회수 : 1962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나귀를 타고 성전으로 입성하십니다.
사람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임금님은 복되시어라.’ 하늘에 평화, 지극히 높은 곳에 영광!”(루카 19,38)
이라고 노래합니다. 주님께 임금님으로 임명되어 우리에게 오시는데, 그분은 평화를 주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을 기뻐하지 않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스승님, 제자들을 꾸짖으십시오”(루카 19,39)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들이 잠자코 있으면 돌들이 소리 지를 것이다”(루카 19,40)라고 하시며, 슬픈 마음으로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 !
그러나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 (중략)
네 안에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게 만들어 버릴 것이다.
하느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루카 19,42.44)라고 한탄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하느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실 때,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나의 겉옷을 그분 밑에 까는 것이고 하나는 귀가 찢어질 정도로 찬미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느님을 주님으로 맞아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복음의 짝을 구약에서 찾으라고 한다면 솔로몬 임금의 즉위식으로 볼 수 있습니다(1열왕 1장 참조).
다윗은 자기 아들 솔로몬을 자기 대를 이을 임금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의 형인 아도니야가 사람들을 규합하여 왕이 되려 합니다.
현 상황으로는 그를 막을 방법이 없어 보입니다. 다윗 임금도 큰 관심이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나탄 예언자와 솔로몬의 어머니 밧 세바가 청원하자 다윗은 이런 명령을 내립니다.
곧 자기 나귀에 솔로몬을 태워 샘이 있는 기혼으로 내려가 거기에서 머리에 기름을 붓고 왕으로 세우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팔을 분 다음 “솔로몬 임금 만세!”하고 외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나귀를 타고 임금의 왕좌까지 올라오게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모든 백성이 그의 뒤를 따라 피리를 불고 올라가며 큰 기쁨에 넘쳐 환호하였는데,
그 소리에 땅이 갈라질 지경이었다.”(1열왕 1,40) 
 
상황이 이렇게 되니 이 찬미 소리를 듣고 아도니야는 겁을 먹고 성전의 뿔을 잡고 나오려하지 않았습니다.
아도니야는 결국 다윗을 시중들던 여인을 솔로몬에게 청했고 솔로몬은 계속 왕위를 노리는 것 같은 아도니야를 죽입니다. 
아도니야는 왕권을 강탈하려는 자였고 시민들의 찬미 소리에 질겁하고 결국 솔로몬의 왕국에서 아무것도 바랄 수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카인의 제물이 왜 하느님 앞에 기꺼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을까요?
그의 제물이 정성스럽지 않았다는 말은 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 따르면 십일조를 상징하는 겉옷을 까는 사람들의 찬미 소리가 우렁차게 올려졌습니다.
그래야 주님을 주님으로 인정하는 예식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카인은 제물은 바치되 기쁘게 찬미하지 못한 것입니다.
기쁘게 드리지 못하는 예물은 나의 것을 드리는 것이지, 그분의 것을 기쁘게 돌려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기혼 샘은 본래 예루살렘 외곽 아래쪽에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기름을 부으라는 말은 겸손해져야 받을 수 있는 것이 성령이란 뜻입니다.
그리고 그 아래에서부터 주님을 찬미해야 모든 예루살렘 시민이 들을 수 있습니다.
겸손과 봉헌은 하나입니다.  
 
만약 아이에게 과자를 사주고 “아빠도 하나만 줄래?”라고 할 때, 아빠는 다음에 또 과자를 사주고 싶을까요?
기쁘게 주는 아이에게 더 주고 싶을 것입니다. 아빠를 아빠로 인정한다면 기쁘게 과자를 내어주고 아빠가 좋다고 소리쳐야 합니다.
그러면 아빠에게 다 얻을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일이 다윗에게도 있었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왕이지만 참 왕이신 하느님을 자기 집에 모시려 했습니다.
계약의 궤를 모셔 오는 것입니다.
그때 그도 옷을 다 벗고 주님 앞에서 덩실덩실 춤을 추었습니다.
왕의 행세를 하지 않고 그분 앞에서 벌거벗은 어린이가 된 것입니다.
이때 그의 아내 미칼은 이렇게 비웃습니다. 
“오늘 이스라엘의 임금님이 건달패 가운데 하나가 알몸을 드러내듯이, 자기 신하들의 여종들이 보는 앞에서 벗고 나서니, 그 모습이 참 볼 만하더군요!”(2사무 6,20) 
 
미칼은 사울의 딸로서 다윗이 위험할 때 그것을 다윗에게 알려주어 다윗의 목숨을 구한 적이 있는 여인이었습니다.
하지만 미칼은 여전히 다윗 위에 서 있으려 했습니다. 다윗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당신 아버지와 그 집안 대신 나를 뽑으시고, 나를 주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도자로 세우셨소.
바로 그 주님 앞에서 내가 흥겨워한 것이오.
나는 이보다 더 자신을 낮추고, 내가 보기에도 천하게 될 것이오.
그러나 당신이 말하는 저 여종들에게는 존경을 받게 될 것이오.”(2사무 6,22) 
 
결과는 이렇습니다. 
“그 뒤 사울의 딸 미칼에게는 죽는 날까지 아이가 없었다.”(2사무 6,23) 
 
이스라엘 여인에게는 자녀가 없는 것이 가장 큰 수치입니다. 
아도니야와 같이 왕권을 노리다 저주를 받은 것입니다.
왕 앞에서는 자신을 내려놓고 낮아져 천하게 되어야 합니다.
그 방법이 창피함을 무릅쓰고 춤추며 찬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미사 때 이렇게 합니까? 우리는 어쩌면 하느님보다 더 근엄합니다.
찬미도 거의 소리를 내지 않거나 율동까지 한다고 하면 비천한 모습이라고 꺼리는 신자들도 있습니다.
오늘 그러면 안 됩니다.
오늘은 우리를 위해 돌아가셔서 우리 안에서 자아의 압제를 이기고 당신이 평화의 왕이 되시는 날입니다.
그러니 팔마가지를 마음껏 흔들고 힘껏 찬미해야 합니다.
그리고 매 미사가 그래야 합니다.  
 
미사 때 하는 봉헌이 우리 겉옷을 까는 것이고 그것과 함께 기쁜 찬미가 울려 나와야 합니다.
그다음에 나귀를 타고 오시는 그분, 곧 성체를 우리 안에 모셔 우리 왕이 되게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을 낮추고 찬미하지 않는 사람은 실제로 그 사람을 맞아들여도 왕으로 삼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이미 자신을 왕으로 삼고 있기에 새로운 왕 앞에서 기쁠 수 없는 것입니다.  
 
베르나데트는 지금은 큰 성지가 된 루르드 한 지역에서 성모님을 만납니다.
성모님은 베르나데트에게 작은 흙탕물을 가리키며 가서 마신 다음에 몸을 씻으라고 지시했습니다.
베르나데트는 그대로 했고 주변 사람들은 베르나데트가 미친 줄 알았습니다.
성모님은 베르나데트에게 그 구렁텅이를 손으로 파보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깨끗한 샘물이 갑자기 엄청난 양으로 솟아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 물을 마시고 바른 사람들이 치유되기 시작했고 이 소식이 방방곡곡에 알려지면서,
많은 기적 사례가 보고되었습니다.
그들 가운데 7명은 1860년 베르게 교수에 의해 어떠한 의학적 설명도 불가능하다는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왜 성모님은 기적을 주시기 전에 사람을 저렇게 낮추실까요?
우선 당신을 왕으로 영접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왕으로 영접한다는 말은 자신을 종으로 낮춘다는 말입니다.
그것도 기쁘게 낮춘다는 말입니다.
나로 사는 것보다 그분의 종으로 사는 것이 훨씬 큰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당신께 자신을 봉헌하며 기쁘게 찬미할 줄 안다면 주님은 그 사람을 통해 많은 이를 치유하게 하십니다.
특별히 봉헌 시간에 더 크게 찬미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강론 후에 기쁨의 찬미를 바로 할 수 있다면 더 좋을 것입니다.  
 
필립보 네리가 한 성녀라고 불리는 수녀님을 조사하기 위해 방문했습니다.
비가 와서 신발이 지저분했습니다. 그래서 그 수녀님을 불러 신발을 닦으라고 시켰습니다.
그랬더니 그 수녀는 자신을 뭐로 아느냐며 거부하였습니다.
필립보 네리는 돌아가서 교황에게 말했습니다. 
“그곳에는 성인이 없습니다.” 
 
왜 하느님께서 우리를 낮추실까요? 더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유치원 다녀온 아이가 배운 춤을 부모 앞에서 춘다면 부모는 얼마나 기쁩니까?
더 부끄럽게 소리높여 찬양합시다.
이것이 부모에게 더 내어놓는 자세이고 더 받을 자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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