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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3월 30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홍보실 작성일 : 2022-03-30 조회수 : 1909

평안(平安)에 이르는 법: 평화와 안식의 차이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과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어제는 예수님께서 벳자타 연못에서 38년 동안 병을 앓던 사람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그 방법은 ‘은총과 진리’를 통해서였습니다.
40에 이르렀을 때 하느님의 양이 되는 것입니다.
에덴에서 아담이 하는 하느님의 일이란 이렇게 동물을 새로 태어나게 하여 새로운 이름을 지어주는 것입니다.  
 
이때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그런 일을 했다고 하여 예수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요한은 안식일의 의미가 사실 주일에 일하지 않고 쉬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음을 오늘 결론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안식은 아담의 일을 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입니다.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요한 5,17) 
 
예수님은 이렇게 안식이 일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라 하십니다.
여섯째 날 동물에게 이름을 지어줌으로써 일곱째 날을 맞을 수 있게 됩니다.  
 
안식을 우리말로 한다면 ‘평안’(平安)이 제일 합당하다 생각합니다.
평안은 평화와 안녕, 혹은 안식이 합쳐진 말입니다. 
안식일에 도달하려면 먼저 평화를 찾아야 합니다.
평화를 찾았다고 안식에 든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처럼 일해야 합니다.  
 
평화와 안식은 조금 다릅니다.
‘평화’는 아이가 부모의 사랑을 깨닫고 마음이 평온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느님께서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으셨음을 알고는 평화로워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식’은 그렇게 하신 분처럼 나도 자녀로서 따라 함으로써 도달하게 되는 행복입니다.  
 
예를 들자면 저에게 예수님께서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 라고 하셨을 때
가지게 된 것이 ‘평화’입니다.
‘아, 이렇게나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해주셨구나!’라고 깨닫는 게 평화입니다. 
 
제가 ‘내 어머니는 다리 밑에 계신 게 아닐까?’라고 생각하다가, 어머니가 해 주시는 사랑을 보고는
‘아, 내 어머니가 저분이 맞는구나!’라고 느끼는 것이 평화입니다.  
 
평화를 얻었다고 안식에 이른 게 아닙니다. 부모나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해주셨다면 나도 자녀 된 도리로 그런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래서 자녀를 낳고 부모처럼 양식을 먹이며 일을 마치고 나서 느끼는 평화가 바로 안식입니다.
받은 것처럼 해줄 때 비로소 부모 앞에서 안식을 누립니다.  
 
예수님께서 벳자타 연못의 병자를 고쳐주신 것은, 세례 때 받은 성령과 말씀을 그에게 전해 주어
그도 당신처럼 다시 태어나게 해주신 후에 ‘안식’을 누리기 위함이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믿는 것만으로는 안식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그분처럼 일해서 그분의 자녀라는 안도감이 들 때 비로소 안식일을 누릴 수 있습니다.  
 
‘나의 아저씨’는 아이유가 연기한 지안이란 한 상처투성이 젊은 청년의 성장기입니다.
이를 ‘지’(至), 평안 ‘안’(安). 평화도 없던 한 사람이 안식에 이르는 이야기입니다.
마지막은 이렇게 끝납니다. “지안, 편안함에 이르렀는가?”  “네…. 네.” 
 
지안은 살인자입니다. 빚 독촉에 시달리며 구타당하는 어머니를 구하려다 사람을 살해한 21살 여자입니다.
이지안은 정당방위로 무죄입니다.
그러나 살인자란 꼬리표는 여전히 이지안을 따라다닙니다.
자신이 죽인 사람의 아들인 이광일로부터 여전히 빚 독촉에 시달립니다.
이광일은 빚이 문제가 아니라 아버지를 죽인 원수에 대한 복수로 무조건 지안이를 괴롭히는 것입니다.  
 
죽고 싶은, 이름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이지안은 어떤 회사에 들어갑니다.
이력표에 달리기 잘한다는 것 빼고는 아무것도 없는 지안이를 박동훈이란 만년 부장이 뽑아주고 인간적으로 대해줍니다.
힘든 처지에서도 노모를 모시는 모습이 마음에 들었던 것입니다.
지안이는 점점 마음을 열고 세상에 사랑이 있다는 것도 믿어갑니다.  
 
박동훈도 후배에게 밀려 어쩔 수 없이 회사에 붙어살아야만 하는 불쌍한 인간입니다.
아내가 자신을 앞질러 대표이사가 된 도준영과 바람을 피우는 것을 알면서도 참아내야 합니다.
박동훈은 아내에게 그렇게 하는 것은 집 밖에서나 집 안에서나 자신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것과 같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참아나가야 합니다.  
 
처음에 지안이는 박동훈을 이용하려 합니다. 그러나 세상에 유일하게 자신에게 잘 대해주는 박동훈 부장을 인간적으로 좋아하게 됩니다.
회사에서는 박동훈을 몰아내기 위해 이지안을 이용합니다.
이지안이 박동훈을 인간적으로 좋아한다는 것을 가지고 트집을 잡으려 하는 것입니다. 
 
이지안은 많은 회사 중역들이 모인 곳에서 박동훈을 좋아한다고 말합니다.
박동훈도 그녀가 살인자라는 것을 알면서도 회사에 받아주었다고 말합니다.  
 
박동훈에게 안 좋은 일을 벌어지게 한 자신을 탓하며 이지안은 또 삶의 의욕을 잃습니다.
그러나 박동훈은 그래도 지안이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합니다.
지안이는 그렇게 평안을 찾는 듯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부족하였습니다.
그런 희생을 실천해야 평안에 이르는 것입니다.  
 
지안이는 자신을 괴롭히는 원수인 이광일도 용서합니다.
광일은 어느 날 자신의 어렸을 때의 관계를 기억하는 지안이의 이런 말을 듣습니다. 
 
“착했던 애예요. 걔네 아버지가 나 때리면 말리다가 대신 맞고…. 걘 날 좋아했던 기억 때문에 괴롭고, 난 걔가 착했던 기억 때문에 괴롭고. 미안해, 광일아.” 
 
광일은 지안이가 그런 마음을 가졌으면서 자신에게 당해준 것 때문에 눈물을 흘립니다.
자신이 어둠임을 지안이를 통해 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모두가 상처를 딛고 일어섭니다.
지안이는 다른 회사에서 일하고 박동훈은 회사를 나와 개인사업을 합니다.
우연히 카페에서 만난 둘은 대화를 나눕니다. 그들만의 대화입니다.  
 
“지안, 편안함에 이르렀는가?”  “네…. 네.” 
 
사랑을 만났을 때 느끼는 감정이 평안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실천할 때 받는 감정이 안식입니다.
안식에 이르기 전까지 그 평안함은 항상 부족할 수밖에 없습니다.
부모가 피를 흘리며 나를 낳기 땀을 흘리며 키웠다면, 나도 그렇게 할 때 참 안식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평화는 은총에 의해 얻는 것이고 안식은 진리에 의해 완성되는 것입니다.
저의 안식은 이렇게 복음 묵상을 나눔으로써 완성됩니다.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고 하실 때 얻은 것이 평화입니다.
그런데 나도 이웃에게 그렇게 다 내어주기 전까지는 안식에 이를 수 없습니다.
평화를 거저 받았기에 빚을 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갚아야 안식에 이릅니다. 
 
먼저 하느님 사랑을 깨달아 평화를 누립시다. 그다음엔 그 평화가 안식이 되도록 키워가야 합니다.
그분이 일하시니 우리도 일해야 합니다. 
그다음에 안식에 들어갑니다.
이것이 안식일을 지키는 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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