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28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홍보실
작성일 : 2022-03-28
조회수 : 1846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원하려면 진정으로 원하라
김창옥 교수는 강사로서 매우 유명합니다.
김창옥 교수가 이렇게 훌륭한 강사가 되었지만, 그에게도 아픔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가 사춘기가 되었을 때, 자신의 집이 가난하고 자신의 부모님이 사이가 좋지 않고, 또 자신의 아버지가 놀음에 빠져 있었고, 몸도 성치 않아 귀가 안 들린다는 것을 알게 되고는
창피함을 느끼고 집을 떠나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공부를 잘하지는 못하였는지 인문계가 아닌 공고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친구들은 가방에 책이 들어있었지만, 자신의 책가방에는 드라이버와 인두가 들어있었다고 합니다.
스스로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하여 강한 척 하고 항상 밝은 척 하며 남을 많이 웃기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공부는 정말 하고 싶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대학에 가고 싶어서 전문대에라도 시험을 쳤지만 떨어졌고 어머니가 자신을 창피하게 여긴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도 시험이 떨어져서 죽고 싶은 마음뿐이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그냥 장난처럼 “그냥 하던 대로 해~”라는 말뿐이었고, 그래서 정말로 죽기 위해 바닷가로 갔습니다.
그 바닷가에 자기보다 먼저 와 있는 흰 옷을 입은 여자가 있더랍니다.
말을 건넬 틈도 없이 그 여자는 치마를 뒤집어쓰고 뛰어내렸는데, 거짓말처럼 중간에서 사라져버렸습니다.
귀신을 본 것이었습니다.
죽더라도 덜 무서운 곳에서 죽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는 다시 시작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래서 결국 삼수해서 전문대에 합격을 하게 되었고 노력을 거듭한 끝에 지금은 시간이 없어서 강의를 못할 정도로 유명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가 차에서 일본에서 안타제조기라 불리었던 장훈 선수의 이야기를 듣고는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장훈 선수가 워낙 잘하자 일본인들은 장훈 선수가 일본인으로 귀화하기를 바랐다고 합니다.
그러나 장훈 선수는 자신은 한국인이라며 귀화를 거부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타석에 들어섰을 때 일본인들은 장훈 선수를 향하여 욕설을 퍼부으며 한국으로 돌아가라고 야유를 보냈습니다.
그러나 장훈 선수는 굴하지 않고 장외 홈런을 쳐버렸고 그 야유를 퍼붓던 일본관객들은
조용해 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거기에서 주저앉을 거면 아예 시작을 하지 말았어야 합니다.
그러나 시작했다면 끝장을 보아야합니다.
그리고 장애물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은 막상 넘고 나면 내가 만들어 놓은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농구황제 마이클 조던 (Michael Jordan)은 초등학교 때부터 시작해 열두 살에 MVP로 선정 되었으나 고등학교 때는 학교 대표팀에도 뽑히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루드비히 반 베토벤 (Ludwig van Beethoven)은 어린 시절 음악 선생님으로부터 재능이 없다는 평을 들었습니다.
실제로 그 선생님은 베토벤에 대해 “작곡가로서 그는 전혀 희망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월트 디즈니 (Walt Disney)도 젊은 시절 만화를 그리고 싶었으나 캔사스 시에서 신문 편집자로 일하라는 충고를 받았습니다.
그 이유는 “창의적이거나 독창적인 아이디어가 전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알버트 아인슈타인 (Albert Einstein)도 열 살 때 뮌헨 교장으로부터 “너는 절대로 제대로 자라지 못할 거다”라는 가혹한 말을 들었습니다.
토마스 에디슨 (Thomas Edison)도 어린 시절 교사로부터 “너무 바보 같아서 가르칠 수 없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아마 이런 위대한 인물들을 나열하라면 한도 끝도 없을 것입니다.
사실 위대한 사람치고 한계에 부딪히지 않거나 고비가 없었던 사람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왜 작은 어려움이 발생하면 하려던 것을 포기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인물들은 남들이 그렇게 안 된다는 것을 끝까지 물고 늘어져 큰 업적을 이루어냈을까요?
포기하는 사람은 그 벽을 넘을 만큼 절실히 원하고 있지는 않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좋은 것을 주시기 전에 항상 우리가 그만큼 원하고 있는지를 시험하십니다.
오늘도 두 번째 기적을 해 주시기 전에 당신을 찾아온 왕실 관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들은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고서는 믿지 않는다.”
사실 집에 돌아가다가 종이 관리의 아들이 낳았다는 전갈을 주었고 그 시간이 예수님이 아들이 나을 시간이라고 했을 때와 일치하기 때문에, 그와 온 가족이 믿었다고 나옵니다.
그렇다면 그 이전에는 완전히 믿지는 못했다는 말입니다.
사실 믿음은 믿으려고 할 때 그 믿음의 확정적 증거를 주셔서 더 커지게 되어있습니다.
다만 왕실 관리는 그런 부정적인 대답에도 실망하지 않고 예수님을 자신의 집에 모시고 가려고 했기 때문에 그 벽을 넘어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벽을 넘으면 그것이 벽이 아니었음을 알게 됩니다.
마라톤을 하다보면 포기하고 싶은 벽에 반드시 부딪힌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벽을 넘는 유일한 방법은 그냥 처음 한 발을 내디딜 때처럼 또 한 발을 내딛는 것이라고 합니다.
한 발 한 발이 결국 마라톤을 완주하게 만듭니다.
다 뛰고 나서야 애초부터 벽은 없었다는 것을 깨닫는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어려움과 벽은 내가 실망하고 낙심해서 내 스스로 만드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원한다면 나를 막을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삶의 어려움이 닥치고 포기하고 싶어진다면
내가 진정으로 끝까지 달리기를 원하고 있는지부터 생각해보아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