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22일 [사순 제3주간 화요일]
마태오 18,21-35
용서는 백 데나리온을 일만 탈렌트에 포함하느냐의 문제
오늘 복음은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첫 번째는 베드로가 무슨 연유에서인지 하루 몇 번까지 용서해 주어야 하느냐고 예수님께 묻습니다.
참다가 못 참으면 용서하지 않아도 되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용서는 끝이 없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만 탈렌트(하루 일당이 10만 원일 때 약 6조 원) 탕감받은 종이 백 데나리온(약 천만 원) 빚진 친구를 감옥에 가두는 말씀을 해 주십니다.
사실 6조 원의 빚을 탕감받았더라도 천만 원이 더 있어서 나쁜 것은 없습니다.
세상에서는 이 종은 잘못한 게 없습니다.
자기의 것을 꾸어준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종’이라는 사실입니다.
종의 것은 다 주인의 것입니다.
종이 꾸어준 천만 원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 자신이 받았던 6조 원 안에서 꾸어준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의롭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 새겨져 있어야 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창조해 주시고 아드님의 죽음을 통하여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는 믿음입니다.
내가 이 사실을 지워버리고 살 때 그 마음에는 다른 것이 새겨집니다.
바로 ‘불안’입니다.
나의 것을 빼앗길 것 같은 불안입니다.
그 불안함에 남이 나에게 피해를 주는 것을 용서할 수 없게 됩니다.
영화 ‘익스팅션-종의 구원자’(2018)에서 주인공 피터는 밤마다 악몽을 꿉니다.
자꾸 누군가가 자신들을 공격하는 꿈입니다. 피해망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내 앨리스는 신경정신과에 가서 상담받아보라고 합니다.
그러나 피터는 그러면 직장에서 해고당할까 봐 선뜻 병원에 나서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일하다 쓰러져 가족 파티에 참석하지 못하는 등 어려움을 겪으면서 병원을 찾습니다.
그런데 병원에서 만난 어떤 사람은 피터가 수면장애가 있고 하늘에서 빛이 보이고
그것들이 사람을 공격하여 죽게 만드는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알아맞힙니다.
이런 증상이 여러 명에게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꿈에서 일어났던 일들이 실현됩니다.
하늘에 불빛들이 나타나고 세상을 초토화합니다.
외계인들의 침공입니다.
살아남은 몇몇은 지하로 대피합니다.
이 과정에서 아내 앨리스가 총을 맞고 상처를 입습니다.
이때 외계인 한 명이 생포되어 오는데 그 외계인이 슈트를 벗자 그 안에는 한 젊은 사람이 들어있었습니다.
그들은 외계인이 아니라 인간이었던 것입니다.
그가 여자를 살릴 수 있다고 말합니다.
전력이 부족하여 남편인 피터가 칼로 가슴을 전력을 나누어 여자가 살 수 있다는 이상한 말을 합니다.
피터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하지만 어차피 아내가 죽어가기에 자신들을 침공한 그의 손에 맡겨보기로 합니다.
그가 아내의 상처 부위를 칼로 열었을 때 아내는 인간이 아니라 기계였습니다.
그리고 피터도 가슴을 열어보니 기계입니다.
사실 지구에 살고 있던 모든 인간은 사이보그입니다.
그들이 자신들을 만든 인간들을 몰아내고 기억을 삭제한 것입니다.
자신들이 인간에 의해 만들어지고 인간을 몰아냈으며 그들의 땅에서 살고 있음을 기억하는 것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피터의 꿈에 자주 나타났던 것은 인간들을 몰아낼 때의 전쟁 기억입니다.
일부 사이보그들 안에서 그 기억이 완벽히 제거되지 못하여 그런 수면장애에 시달렸던 것입니다.
피터만이 그 기억이 어떤 의미가 있을 것이라 여겼고 덕분에 아내를 살릴 수 있었습니다.
인간들은 사이보그에게 지구를 빼앗겨 화성에 이주하여 살다가 다시 준비하여 지구를 찾으러 돌아온 것이었습니다.
어차피 사람은 믿고 싶은 대로 믿습니다.
영화는 묻습니다.
“우리는 누구일까?”
사람들은 자신들이 저절로 생겨났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창조주에게서 받은 모든 것을 잊고 삽니다.
자신들이 누리는 것이 자신들의 것이라 여깁니다. 그러다 보니 그것들을 빼앗길 것을 두려워합니다.
하지만 저절로 존재하게 되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저절로 수건에서 꽃이 나오거나 토끼가 나오게 하는 것은 마술이고 속임수입니다.
실제로는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그런 것을 믿어버리면 이제 받은 것에 감사하기보다는 잃을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 두려움은 사람들을 미워하게까지 만들고 심지어 공격하게 합니다.
이 영화에서 사이보그 합성물들은 자유를 얻기 위해 인간이 자신들을 만들었다는 기억을 지웠습니다.
그러나 끊임없이 자신들이 어디서 생겨났는지에 대한 의문을 가지고 불안함에 떨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피터와 그 가족들은 압니다. 끊임없이 우리가 창조되었음을 자유를 얻는다는 명목으로 지우며 살았기에 그렇게 불안해야만 했던 것을.
저절로 생겨나지 않았고 저절로 구원되지 않는다는 것.
곧 부모의 피 흘림 없이는 지금의 내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기로 한다면 이제 백 데나리온은 만 탈렌트 안에 들어갑니다.
어차피 우리가 잃는 모든 것은 받은 것 중의 극히 일부입니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시고 구원하셨음을 믿는지 안 믿는지의 차이입니다.
내가 받은 만 탈렌트를 잊으면 내가 빼앗긴 백 데나리온은 온전히 나의 것이 되기에 용서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삶을 선택할 것인지는 나에게 달렸습니다.
영화 ‘그레비티’도 마찬가지입니다.
라이언 스톤 박사는 이혼 후 어린 딸까지 교통사고로 잃은 삶의 의욕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고로 우주공간으로 한없이 빨려 들어가는 라이언을 맷 코왈스키 박사는 목숨을 걸고 찾아서 데려옵니다.
이 과정에서 그는 목숨을 잃고 맙니다.
결국 갖은 고생 끝에 라이언은 지구의 땅을 밟게 되고 새로운 희망으로 일어섭니다.
자신이 생존하기 위해 누군가의 희생이 있었음을 기억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기억하면 이제 자신이 잃은 결혼생활이나 딸은 자신의 받은 것의 일부가 됩니다.
그래서 견뎌낼 수 있습니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도 마찬가지입니다.
라이언 하나 구하자고 수많은 베테랑 군인들이 희생했습니다.
그리고 라이언에게 부탁했습니다.
자신들의 몫까지 잘 살아달라고.
라이언은 그들의 몫까지 잘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죽기 직전에 많은 군인의 희생으로 살아난 라이언은 잘 살지 못할 수가 없었습니다.
덤으로 주어진 인생이었기에 잃는 걱정보다는 감사가 더 컸기 때문입니다.
이런 기억이 잃는 두려움과 그로 인해 생기는 고통을 견디게 해 줍니다.
그러나 그들로부터 자유를 얻기 위해 기억을 지운다면 어떻게 될까요?
이제 백 데나리온으로 살인까지 저지르는 사람이 됩니다.
정신분석 전문의인 이무석 박사가 군대에서 군의관으로 근무할 때 한 자해하는 청년을 만났습니다.
그는 살아가는 의미를 찾지 못하고 칼로 배를 그어 배에 수십 개의 칼자국이 있었습니다.
박사가 왜 자꾸 자해하느냐고 물으니 청년은 자신이 왜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고 그냥 우주에 붕 떠 있는 느낌인데 그렇게 자해하고 피가 나고 쓰라린 아픔이 오면 그래도 살아있음을 느끼게 된다고 대답했습니다.
바로 일만 탈렌트를 탕감받았음을 잊고 사는 사람의 상태입니다.
적어도 부모에게 사랑받아야 했지만 그러지 못해 살아야 할 의미를 잃은 것입니다.
자신의 것을 지켜야 하지만 그것은 너무 힘이 듭니다.
그냥 없애버리는 게 마음이 편합니다.
그래서 자해하며 아예 가진 것이 없게 만들고 싶습니다.
가진 것이 있으면 빼앗길까 봐 두렵기 때문입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일만 탈렌트 안에 포함해야 합니다.
그래야 두려움 없이, 미움 없이 편안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미사 때마다 우리는 이런 말을 듣습니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이 말씀은 이렇게 바꿀 수 있습니다.
“너희는 내가 탕감해 준 일만 탈렌트를 기억하며 모든 것을 잃어도 감사할 줄 아는 삶을 살아라.”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