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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3월 16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2-03-16 조회수 : 1670
3월16일 [사순 제2주간 수요일]  
 
마태오 20,17-28 
 
부모는 자녀를 경쟁시키지 않는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죽음과 부활에 대해 예고하십니다.
모든 복음은 예수님께서 왜 죽으셔야 했는지가 그 핵심주제입니다. 여기서는 ‘섬기기 위해서’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신의 죽음에 대해 말씀하실 때 제베대오의 두 아들은 열두 사도 중 더 높은 위치에 앉으려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물론 오늘 복음에서는 어머니가 대신 청합니다.
자기 아들 둘을 마지막 때 예수님의 오른편과 왼편에 앉게 해 달라고. 이에 나머지 열 제자가 화를 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죽음이 아버지 앞에서 더 높아지려 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형제를 섬기기 위함임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마태 20,28)
 
유튜브에 오빠와 여동생이 좀 위험한 곳을 건너가는데 여동생이 너무 작아 건너지 못하자
오빠가 인간 다리가 되어 주는 동영상이 있습니다. 
부모님이 보지도 않는데 이렇게 오빠가 동생에게 하는 모습을 보면 오빠는 부모에게 사랑을 충분히 받았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합니다.
이미 충분한 사랑을 받은 오빠는 굳이 동생과 경쟁하여 부모의 사랑을 독차지하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렇게 부모는 형제끼리 서로 섬기기를 바랍니다.  
 
물론 일부러 그러지는 않겠지만, 만약 부모가 형제를 차별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자녀들은 경쟁하게 됩니다.
가족 공동체라기보다는 회사처럼 경쟁 사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가정이 지옥이 됩니다.  
 
‘금쪽같은 내 새끼’에 첫째 13살부터 막내 2살까지 7남매를 키우는 한 부부의 일상이 공개되었습니다.
아이 일곱을 키우는데도 부모는 정말 열심히 일해서 가정도 가난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충분한 사랑을 줄 여유가 없습니다. 아빠는 밤 아주 늦게 들어오거나
아예 들어오지 못하는 경우가 많고 엄마는 자신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아이들을 돌보아야 합니다.
아이들과 함께 밤 10에 집으로 돌아와서 아이들을 씻기고 재웁니다.  
 
여기에서 외톨이가 되기 시작한 아이는 13살 사춘기가 된 아들입니다.
첫째는 이제 동생들과 어울리려 하지 않고 오히려 동생들을 괴롭힙니다.
일곱 형제 중 유일하게 스스로 왕따가 되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가만히 보니 엄마가 너무 많은 아이를 키우니 어쩔 수 없이 아이들을 군대식으로 키우는 것입니다.
첫째 아들과 둘째 딸을 데리고 장난감 가게에 가서 장난감을 골라오라고 합니다.
그런데 엄마가 첫째와 둘째를 경쟁시킵니다. 
먼저 동생들과 놀 수 있는 적당한 장난감을 골라오는 사람에게 자신이 원하는 장난감을 하나 더 사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첫째가 조금 성숙했으니까 판매원에게 물어서 엄마가 원하는 장난감을 먼저 가져갑니다.
둘째는 경쟁이 되지 않은 이 상황에서 삐져서 말도 안 합니다.  
 
오은영 박사는 이것을 지적합니다. 
형제간에 ‘경쟁’이 있어서는 안 되고 경쟁은 자기 자신과 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성장이 매우 빠른 연령대에서 오빠에게 경쟁이 안 되고 오빠는 경쟁에 이기더라도 본전입니다. 
지면 동생들 앞에서 말이 아닙니다.
동생들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아예 동생들과 함께 안 지내는 것이 자신에게 더 편안합니다.
전쟁에서는 승자가 있을 수 없습니다. 모두가 피해자입니다.
자녀를 경쟁시키면 자녀들도 그렇게 됩니다.  
 
경쟁하게 되면 자녀는 두 가지를 선택하게 됩니다. 
경쟁이 두려워 아예 회피하던가 아니면 끝까지 경쟁에서 이기려 기를 씁니다. 
경쟁을 회피하는 것도 경쟁하는 것입니다.
달리기에서 멈추어 섰어도 여전히 운동장에 있는 것입니다. 
경쟁하건, 경쟁을 포기하건 경쟁 안에서는 쉴 수 없습니다.
커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지옥에 삽니다.  
 
이무석 교수의 책에서 ‘작은 눈 콤플렉스’를 지니고 있었던 한 여자의 사연을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첫째 딸로 태어나서 부모의 사랑을 많이 받다가 동생이 태어나자 부모의 자신에 대한 사랑이 줄어듦을 느꼈습니다.
동생은 눈에 쌍꺼풀이 있고 자신이 없었기에 자신이 사랑받지 못하는 이유를 작은 눈 때문이라고 믿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아버지의 마음에 들기 위해 공부도 열심히 하고 돈도 많이 버는 유명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아버지의 사랑은 동생이었습니다.  
 
결혼해서 어떻게 되었을까요? 경쟁을 독촉하는 이 자매를 어떤 남편이 참아줄 수 있을까요?
남편은 술집 여자와 바람이 났고 이것을 안 자매는 자기처럼 능력 있고 예쁜 여자를 두고 그런 남편을 용납할 수 없습니다.  
 
훌륭한 아내가 되어야 하기에 겉으로는 남편을 용서한다고 하면서도 마음으론 용서가 안 됩니다.
직장에서 퇴근한 남편에게 집을 나설 때부터 집에 돌아올 때까지를 한 시간 단위로 끊어서 무엇을 했는지를 보고하게 합니다. 
그리고 속이는 것일 수 있으니 그 이야기를 다시 한번 똑같이 반복해 보라고 하였습니다. 
 
꿈에 남편과 바람피운 여자가 꿈에 나타났는데 눈이 상당히 컸습니다. 
그녀는 눈 작은 콤플렉스가 있었습니다.
동생은 눈이 커서 아빠에게 사랑받고 자신은 눈에 쌍꺼풀이 없어서 사랑 못 받는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그래서 남편도 이 이유로 눈이 큰 여자를 좋아했을 것이라는 무의식이 자신 안에 있었던 것입니다.  
 
부모에게 사랑받아서 굳이 경쟁할 필요가 없는 환경에서 살아야 합니다.
의도적으로 자녀를 경쟁시킨다면 참 부모라 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아이들을 이용하는 회사 상사나 군대 상관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러니 그런 곳이 지옥처럼 고통스러운 곳이 되는 것입니다.  
 
또 ‘이무석’ 교수의 『30년 만의 휴식』이란 책에서는 가명 ‘휴’라는 유능한 인재의 사례가 나옵니다.
휴는 어느 날 사장에게 사직서를 내라는 말을 듣고 정신적 스트레스로 설사가 멈추지 않아 이무석 교수를 찾아왔습니다.  
 
그는 초등학교 때부터 일등을 놓쳐 본 적 없는 엘리트였고 대기업에 입사하여 자신 팀장이 회사를 차려 나갈 때 스카웃 되어 함께 회사를 일군 사람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나가라는 말에 황당하기 그지없고 분노가 치미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가 경쟁심이 너무 강해서 더 유능한 인재까지 못 살겠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왜 쉼 없이 달려왔을까요? 그것은 인정받기 위해서였습니다.
아버지는 그가 임신했을 때 유산시킬 것을 권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가 할머니 집에 피신하면서까지 낳은 아이입니다.
아버지는 형만 사랑하고 휴는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여행도 형하고만 갔습니다.
휴는 아버지에게 인정받기 위해 모든 것에서 일등을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회사에서 쫓겨나게 생긴 것입니다. 
 
휴는 아버지에게 있었던 분노를 이무석 교수에게 드러냈습니다. 
자신과의 상담 약속을 어긴 것에 화가 난 것입니다.
아버지처럼 이 교수도 배를 타고 휴가를 떠났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여행 중에 이 교수의 배가 뒤집히는 꿈까지 꾸게 됩니다.
휴는 아버지에 대한 분노를 이무석 교수에게 표출한 것입니다.
그래서 다음에 만났을 때 뾰로통하여 한마디 말도 안 했습니다.  
 
사실 그때 이 교수는 그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아내가 갑자기 쓰려져 응급실로 가게 되어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을 설명했습니다.
그러자 그의 얼굴이 밝아졌습니다. 
그리고 다시 시작된 설사가 멈추었고, 가족들과 또 직장인들과도 온전한 관계를 갖게 되었습니다. 휴는 비로소 휴식을 찾았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제가 신자들을 경쟁시키면 안 됩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신자들을 이용하는 것이고, 그러면 그 밑에서 경쟁하는 봉사자들은 지옥을 살게 됩니다. 
 
하느님의 자녀는 자신의 자녀들을 경쟁시키지 않습니다.
충분한 사랑을 주고 믿게 해서 그 자녀들이 서로를 섬기게 만듭니다.
지옥을 선물하려는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렇게 하지 않으려면 하느님께서 아드님을 죽이셔서 우리에게 주셨을 만큼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게 해야합니다. 
 
모든 노력은 다 인정받으려는 목적이 있습니다.
이미 인정을 받았다면 에덴동산에서처럼 동물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일, 곧 섬기는 일만 남습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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