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7일 [사순 제1주간 화요일]
마태오 6,7-15
기도 바칠 때 내용이 머리에 잘 들어오지 않는 이유
오늘 복음은 ‘주님의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주님의 기도를 알려주시며 ‘하느님을 바꾸려고 기도하지 말고 자신이 바뀌려고 기도해야 함’을 먼저 말씀하십니다.
기도의 목적은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내가 바라고 청할 때 나는 나에게서 벗어나 하느님 자녀의 모습으로 변합니다.
하지만 많은 경우 우리가 하는 주님의 기도는 건성일 때가 있습니다.
무슨 뜻인지 묵상하지 않고 그냥 바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변할 수 없습니다.
자녀는 부모의 뜻대로 변하고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며 변합니다.
하느님의 뜻이 주님의 기도 안에 다 들어있습니다.
‘우와한 비디오’에 클립으로 만든 ‘무게만 25kg이 넘는 갑옷을 입고 사는 아주머니’ 사연이 나옵니다.
아주머니는 집 안에서 자신을 해치려는 누군가가 흘려보내는 전자파 때문에 온 집안 집기들을 비닐로 싸놓고 자신은 클립으로 갑옷을 만들어 입고 살아갑니다.
예전에 치마를 입을 때 정전기가 날 때 클립을 꽂아두면 정전기가 줄어든 것에서 이런 아이디어를 낸 것입니다.
물론 조사를 해 보니 집 안에 정전기는 다른 집보다 적었습니다.
아주머니는 왜 이런 피해의식을 지니고 사는 것일까요?
전문가는 아주머니가 집 자체에 대한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사실 한 번은 만나주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하는 한 남자가 스토커처럼 아주머니를 괴롭힌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집에 있는 시간이 두려움의 시간이었던 것입니다.
그 이후로 집 안에서 안 좋은 전자기파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전문가는 만약 힘들 때 누군가가 함께 있어 주었다면 이렇게까지 자신을 혼자 방어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아마 아렸을 때도 혼자 방치되었던 기억이 있으리라 추측합니다.
동영상에 보니 아주머니는 천주교 신자였습니다. 십자 고상도 나오고 성모상도 나옵니다.
성당에서 미사 보 쓰고 찍은 사진과 피아노 치는 모습, 그리고 책도 읽고 기도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왜 이런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할까요?
분명 주님의 기도만 제대로 바쳤어도 이런 트라우마를 극복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하며 하느님을 아버지로 인식하고 죽음에 대해 덜 무서워해도 되었습니다.
또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라고 하며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만 생각하여 자기 죽음에 대해 걱정할 시간을 줄여야 합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라며 육체의 생존보다 마음의 기쁨과 평화를 청하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라고 하며 나에게 일어나는 일은 모두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일어나게 하신 것임을 믿게 됩니다.
그리고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라고 하며, 클립으로 된 무거운 갑옷이 아닌 영적인 힘을 청하게 되고,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라고 하며 자신에게 피해를 준 사람을 용서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또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라고 하며, 다시는 아버지를 두고 내 생존 문제로 두려워하지 않기를 결심하고, 그렇게 결국 “악에서 구하소서”라며 자아의 압제에서 해방됩니다.
이렇듯 주님의 기도만 의미를 되새기며 바쳐도 하루하루 분명히 달라집니다.
추측건대 이분은 자신이 변화되기 위해 기도하기보다는 자신의 생존을 위협하는 것들로부터 자유롭게 해 달라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자신이 원하는 것을 위주로 기도하면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뜻에는 관심을 둘 에너지가 없었을 것입니다.
아이들이 부모에게 생떼를 쓰는 궁극적 이유는 그것을 가지고 싶어서가 아닐 것입니다.
자신이 부모의 자녀임을 더 굳게 믿고 싶어서 부모를 시험하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원하는 것은 자신의 존재가 부모에게서 나왔다는 증거입니다.
이것을 부모가 자신들의 청을 들어주는 것으로 채우고 싶은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자녀는 자기 욕구에만 집중하여 부모의 뜻에 귀를 막습니다.
그렇게 자기만 아는 아이로 자랍니다.
아이가 이제 자신이 부모의 자녀임을 더욱 믿게 만들기 위해서는 동생의 육아에 참여시키는 것입니다.
‘금쪽같은 내 새끼’, ‘오은영쌤 육아지침서’에 ‘질투 폭발, 동생 스트레스’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누나는 남동생이 태어나자 질투 폭발입니다. 엄마는 딸을 더 사랑한다고 말해주지만, 딸은 모두의 관심이 동생에게 간 것만 같아서 서럽습니다.
그래서 생떼를 부립니다.
이때 오은영 박사의 꿀조언은 ‘동생 육아에 누나도 참여시키는 것’이었습니다.
먼저 인형을 사줘서 조금씩 동생을 안고 다독이는 연습을 하게 하고 조금씩 엄마가 보여주는 쉬운 일부터 돕도록 하는 것입니다.
누나는 그렇게 동생의 육아에 동참하며 자신도 가족의 한 일원임을 깊이 인식하게 됩니다.
만약 친딸이 아니면 동생을 잘못 건드려 다치게 될까 봐 동생에게 손도 못 대게 할 것입니다.
따라서 형제를 사랑하게 하는 것은 하느님의 육아에 참여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자신도 부모의 자녀임을 믿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웃을 사랑하게 하시는 큰 이유 중의 하나입니다.
우리는 이웃을 한 형제로 사랑함으로써 하느님의 자녀임을 더 굳세게 믿게 됩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주님의 기도를 다 알려주시고 마지막에 “너희가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용서하면,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마태 6,14)라고 되풀이하십니다.
이웃은 나의 형제들입니다. 형제들을 용서하고 사랑하고 하느님 육아에 동참함으로써 우리도 하느님의 자녀임을 더욱 굳게 믿게 됩니다.
그러면 그렇게 오는 평화 때문에 이제 나의 욕구로 생떼를 부리기보다는 감사하여 주님의 뜻에 관심을 둡니다.
이렇게 주님의 기도에 무슨 내용이 있는지 묵상하며 기도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청하며 진정 그리스도처럼 변화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합시다.
기도가 이웃 사랑으로 향하지 않으면 완전히 잘못된 방향으로 흐릅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목적으로 기도할 때야만 내가 하느님 자녀라는 확신이 더 커지고, 그러면 오직 주님의 기도 말 안에 자녀가 청해야 할 모든 내용이 다 들어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일치하여 주님의 기도에서 청하는 것들을 주님께 청하면 그 주님의 뜻이 나의 것이 되어 그분의 본성대로 변화합니다.
기도 바칠 때 내용이 머리에 잘 들어오지 않는 이유는 내 뜻을 청하기 때문입니다.
내 뜻만 청하는 이유는 내가 하느님 자녀인지 아닌지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자녀의 믿음은 내가 이웃을 사랑할 때 더욱 확실해집니다.
따라서 자신 안에 갇혀 외로운 사람의 기도는 주님께 절대 오르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