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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3월 3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2-03-03 조회수 : 1849
3월3일 [재의 예식 다음 목요일]  
 
루카 9,22-25 
 
하느님께서 피를 흘리실 수밖에 없는 이유 
 
 
오늘은 예수님께서 당신 죽음과 부활에 대한 예고를 하십니다. 
예수님은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 그리고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은 왜 인간을 창조하고 또 인간을 위해 피를 흘리시는 것일까요?
하느님의 피 흘림 없이는 인간이 구원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느님께서 피를 흘리셨는데 모든 인간이 구원받을 수는 없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하느님의 피를 흘리게 한 장본인이 나 자신이라는 것을 깨달은 사람만 구원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내가 사는 세상에 나오기 위해 반드시 나의 창조자의 피를 흘리게 했음’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어머니의 태중에서 나올 때 어머니를 피흘리게 했습니다.
누구도 이를 부정할 수 없습니다. 
다만 알아야 할 것은 내가 어머니의 피를 흘리게 했음을 깨닫는 자만이 어머니의 세상에서 살아갈 힘을 얻는다는 사실입니다.  
 
유튜브 채널 ‘우와한 비디오’에 ‘누워서 수업 듣는 아이, 엄마와 아들의 위대한 등교’가 있습니다.
성우는 척수근위축증을 앓고 있습니다. 
17살 성우는 몸을 움직이지 못할 뿐 아니라 휜 허리 때문에 왼쪽 세상밖에는 보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의 꿈은 의사가 되는 것입니다. 
몸을 움직일 수 없어서 정신과 의사가 되겠다고 합니다.
어머니가 성우를 학교에 데리고 갑니다. 
체력이 안 되어 오전만 수업하고 오후는 집에 와서 과외를 합니다.
어머니는 쉽지 않은 가정 살림에도 과외 선생님을 붙여 아이가 공부할 수 있게 합니다.  
 
성우는 왜 이렇게까지 공부에 매달리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그가 어머니에게 타인의 손을 빌려 쓴 편지로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엄마에게. 엄마, 아들 성우에요. 요즘 많이 힘드시죠? 엄마도 다른 엄마들처럼 놀러도 가고 영화도 보고 자유로운 생활도 하시고 싶을 텐데 저 때문에 아무것도 못 하시잖아요. 
가끔씩 그런 생각을 해요.
제가 아프지 않게 태어났으면 엄마도 마음이 안 아팠을 텐데….
공부 때문에 스트레스받아서 짜증 내고 투정 부려서 미안해요. 
마음은 그렇지가 않은데 나 자신을 못 이기나 봐요.
엄마에게 투정 부린 날은 하루 종일 마음이 안 좋아요. 
 
엄마 힘든 거 누구보다 제일 잘 아는 놈이 저인데 자꾸 몸이 힘들고 아프니까 저도 모르게 그러는 것 같아요.
엄마한테 말은 한 했지만, 하루하루 더 늙어가는 엄마 얼굴이 너무 속상하고 죄송해요.
내가 아프지만 않았어도…. 공부한다고 너무 유난 떨고 엄마 힘들게 하는 것 같아요.
그런데 공부를 잘해야지 엄마도 호강시켜 드릴 수 있잖아요. 
꼭 성공해서 호강시켜 드릴게요.
우리 조금만 참고 힘내요. 
사랑해요, 엄마. 이 세상에서 엄마를 가장 사랑하는 성우가.” 
 
우리가 나의 처지에 대해 불평하고 남의 탓을 하는 이유는 진정으로 나의 창조자를 찔러보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아니 분명히 찔렀는데 기억하지 못해서입니다. 누구도 내가 어머니 밖으로 나올 때 어머니를 피흘리게 했음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영영 기억해내지 못한다면 그 자녀는 어머니의 세상에서 살 힘을 얻을 수 없습니다.
부모도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세상의 무게를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이들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그 이유는 이들은 하느님이 자신들을 위해 피를 흘리셨음을 의지적으로 믿기를 거부하는 이들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하느님 나라에서 살 힘을 얻지 못합니다. 
 
성우가 이 세상에서 살아갈 힘을 어머니의 희생을 깨달으며 얻어가는 것처럼 우리도 하느님의 세상에 살아가려면 하느님의 희생에서 힘을 얻어야만 합니다.
하느님의 돌아가심을 인정하지 못하면 진짜 하느님의 죽음을 죽이는 인간이 되어버립니다.  
 
여러 번 말씀드렸지만, 이 같은 경우입니다. 지금은 돌아가신 임언기 신부가 한 임종 직전 냉담 신자에게 병자성사를 주러 간 적이 있었습니다. 간암 말기 환자였는데 본인이 청한 것은 아니고, 주위 신자들이 끝까지 성사를 거부하는 것이 안타까워 청했던 것입니다.
배에 이미 복수가 차 있고 숨을 가쁘게 몰아쉬고 있었습니다. 
그는 오랜 냉담을 하고도 병자성사를 거부하고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고해할 것이 없느냐고 묻는 신부님의 질문에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말을 못 하나 싶어 십계명을 일일이 읊어주며 해당하는 것이 있다면 고개를 끄덕이라고 했습니다.
그래도 병자는 미동이 없었습니다. 
결국, 신부님은 고해성사와 병자성사를 거부하는 것에 대해 확신하고 방을 나섰습니다.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 뒤에서 환자가 크게 소리쳤습니다. 
“나 죄 없어!”  
 
바오로 사도는 “의로운 이가 없다. 
하나도 없다.”(로마 3,10)라고 말합니다.
천사도 하느님 앞에서는 부끄러워 얼굴을 가린다고 합니다. 
그런데 인간이 어떻게 죄가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이는 내 죄가 하느님을 피흘리게 했음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이것이 진짜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일입니다. 
그분의 희생을 무가치하게 만들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전에 자신의 어머니를 친구를 시켜 차로 치게 하여 보험금을 타내려던 아들이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다행히 돌아가시지는 않고 휠체어를 타셨습니다. 
아들이 살인미수죄로 재판을 받을 때 어머니는 그 아들을 위해 자신을 대신 감옥에 보내 달라고 탄원을 했습니다.
아들을 잘못 키운 자신의 죄가 크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습니다. 
내가 태어나기 위해 어머니가 피를 흘리셨음을 깨닫지 못하면 그 아이는 또 어머니를 죽이려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어머니의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가정과 세상에 적응하려면 내가 어머니와 아버지를 피 흘리게 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 부모가 해 주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아이를 낳을 때만이 아니라 계속 피를 흘려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이는 부모의 끊임없는 작은 피 흘림을 통해 자신이 태어날 때 엄청난 피를 흘리게 했다는 사실까지 다다를 수 있습니다. 
 
평소에 사랑을 보여주지 못하면 나를 낳기 위해 그런 고통을 겪었음을 믿는 것은 매우 힘이 듭니다.
그래서 하느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끊임없이 미사로 기억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저에게도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는 말씀을 해 주심으로써, 하느님의 죽음이 나를 당신 세상에 살게 할 힘을 주시기 위함임을 조금은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분이 다 주셨다는 말은 나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는 말과 같습니다.
이번 사순 동안은 내가 주님을 찌르는 한 번의 은총이라도 달라고 청해야 합니다.
그러면 누구도 심판할 수 없는 사람이 됩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면서도 우리는 그 엄청난 은총을 받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내가 못 박았음을 깨달으려고 노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 번이라도 내가 주님을 죽였음을 깨닫지 못하면 우리는 하느님을 진짜로 죽이는 사람이 되어
유대 지도자들처럼 하느님 나라에서 살 자격을 잃게 됩니다. 
 
내가 주님의 피를 흘리게 했음을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은 진짜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입니다.
아기에게 세상이 자신이 찢은 어머니의 배 다음에 있듯, 하느님 나라는 내가 찢은 그리스도의 심장 뒤편에 있습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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