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1일 [연중 제8주간 화요일]
마르코 10,28-31
내가 매일매일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증거는?
어제 복음은 돈이 많은 부자가 예수님을 따를 수 없어 슬퍼하며 돌아간 이야기입니다.
재산을 버릴 수 없어서 예수님을 따름을 포기합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오늘 복음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른 제자들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당신을 따르기 위해 버린 것의 백 배를 약속하십니다.
그런데 그 버리는 정도에 따라 첫째와 꼴찌가 결정된다고 하십니다.
사람은 내가 만나러 가는 사람에 따라 어떻게 변하느냐가 결정됩니다.
모든 인간은 누군가를 만나러 갑니다.
그 만나러 가는 대상이 만든 세상으로 들어갑니다.
그 대상이 지옥으로 안내할 수도 있고 천국으로 안내할 수도 있습니다.
내가 향하는 방향에 있는 대상이 사랑 가득한 분이라면 당연히 그 뒤엔 천국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탄이 있다면 그 뒤엔 지옥이 있습니다. 우리는 무조건 두 방향 중 한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내가 사랑이신 하느님의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바로 세상 집착에 대한 욕구가 사라짐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부자는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재물에 대한 집착을 버렸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름은 세상 집착을 버림입니다.
세상 집착이 늘어나는 삶을 살고 있다면 사랑으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살려고 하는 욕구를 죽이기 때문입니다.
‘우와한 비디오’에서 성장 가능성이 최대 1m밖에 안 되는 희소병을 지니고 태어난 대성이를 소개했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인데 키가 매우 작고 몸무게도 10kg을 넘지 못합니다.
손가락도 작고 팔도 제대로 움직일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의 마음은 매우 크고 자유롭습니다.
동생과 놀다가 동생에게 밀려도 “형이니까 참아야지요”라고 말합니다.
아빠가 “대성이 몸 작아서 불편하지 않아?”라고 물으니 대성이는
“아빠, 어쩔 수 없는 거지. 슬퍼하지마, 걱정하지 마!”라고 씩씩하게 말합니다.
모두 자신의 탓인 거 같다며 혼자서 못할 것 같다고 걱정하는 엄마에게 대성이는
“엄마, 나 혼자 할 수 있어”라며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이 하려고 합니다.
부모에게 다가가기 위한 이러한 감미로운 죽음. 이것이 기도입니다.
그래도 기도하지 않으면 주님 앞에 설 수 없는 것입니다.
기도는 어쩔 수 없이 자신과 피나는 싸움을 전제하지만, 부모와 함께할 수 있는 감미로움을 선사합니다.
대성이는 그 불편한 손가락으로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그림도 열심히 그립니다.
대성이가 부모에게 다가가기 위해 하는 행위는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초등학교 1학년이 자신이 그렇게 태어난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라며 오히려 부모님을 위로합니다.
이 사실이 대성이가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대성이는 지금 부모를 향하여 가고 있고 그 부모가 사랑이기에 대성이도 자아의 욕구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마치 뜨거운 용광로를 지나는 것들은 불순물이 다 제거되는 것처럼 사랑의 불로 다가가는 모든 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욕심이 커지면 잘못 가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 에사우는 그리스도의 상징입니다. 레베카는 교회를 상징합니다.
야곱은 우리 자신을 상징하고 이사악은 하느님입니다.
우리는 미사 때 에사우를 먹고 에사우임을 자청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었기에 하느님을 감히 아버지라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야곱의 이야기는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에사우와 가까워지기 위해 야곱이 어떤 노력을 했는지 알아야 합니다.
야곱은 7년 동안 일하여 레아와 혼인하고 또 7년 동안 일하여 라헬과 혼인하였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6년은 혼인을 통해 많은 열매를 맺었습니다.
많은 재산과 가축, 그리고 가족이 늘었습니다.
하지만 마지막 때 에사우를 만나야 합니다.
물론 열심히 살기는 했지만 여전히 에사우 앞에 나설 자신이 없습니다.
자신이 그동안 번 재산을 미리 보내어 에사우에게 다 바칩니다.
그래도 안 될 것 같습니다.
가족까지 다 바쳐도 안 됩니다.
마지막으로 야곱은 에사우 앞에 나설 수 있는 힘을 얻기 위해 기도합니다.
기도는 천사와 씨름하는 것과 같습니다.
너무 힘이 든 시간입니다.
천사는 야곱의 엉덩이뼈를 다치게 하여 에사우 앞에서 똑바로 걷지 못하게 합니다.
이것이 기도가 주는 최고의 선물입니다.
나 자신까지도 내어드릴 수 있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 감미로운 죽음이 우리를 그리스도 앞에 설 힘을 줍니다.
야곱은 형에게 나아가며 일곱 번 땅에 엎드려 절합니다.
그리고 “정녕 제가 하느님의 얼굴을 뵙는 듯 주인의 얼굴을 뵙게 되었고, 주인께서는 저를 기꺼이 받아 주셨습니다”(창세 33,10)라고 말하며 자신의 모든 것, 곧 자기 자신까지 에사우에게 봉헌합니다.
에사우는 야곱에게 상속권을 내주기 위해 저주받을 운명으로 태어났지만, 야곱의 모든 것을 자신의 것으로 삼습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가 그리스도께 나아가기 위해 다 내어주는 사람이 되어야 함을 시사합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그래야만 그분 땅에서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에덴동산에 살려면 그 에덴동산을 주신 분을 믿어야 합니다.
이것이 창조주께 나아가는 신앙인의 자세입니다.
그분을 모든 것의 주인으로 믿기 때문에 그분께 나아갈수록 나의 모든 것을 포기해야만 합니다.
이 힘을 기도가 아니면 얻을 수 없습니다.
유튜브 ‘우와한 비디오’에서 ‘꺾인 다리로 전력 질주, 육상선수 상훈 씨’의 사연을 볼 수 있습니다.
상훈 씨는 선천성 소아마비로 갓난아기 때 파출소 앞에 버려져 시설에서 자랐습니다.
늘 방에서 혼자 보내야 했습니다.
시설에 있는 아이들이 부모가 찾아와서 집에 데리고 가면 상훈 씨도 그렇게 따라가고 싶었습니다.
엄마의 사랑이 그리웠던 것입니다.
물론 부모님의 얼굴을 기억할 수가 없습니다.
많이 원망하고 많이 그리워했지만, 상훈 씨는 부모를 찾는 노력을 멈추지 않습니다.
상훈 씨는 전북 장애인 달리기 선수입니다. 나이 쉰이 훨씬 넘었지만, 상훈 씨는 언젠가 만날지 모르는 부모에게 자신이 잘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매일 자신과 싸워나갑니다.
아직 장애인 전국체전에서 달리기 금메달을 따지 못했기에 부모를 위해 금메달을 따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서 있기도 힘든 그 다리로 매일 달리기 연습을 합니다.
낮에는 자신과 같은 중증 장애인들을 위해 봉사하는 일을 합니다. 그는 말합니다.
“만약에 부모님이 살아 계시면 ‘이렇게 잘 커서 잘 지내고 있구나.’ 그렇게 생각하실 것 같아요.”
그런데 부모님이 상훈 씨를 TV에서 보았다고 해도 상훈 씨 앞에 나타날 수 있을까요?
현실적으로는 양심상 그럴 수 없습니다.
상훈 씨는 부모를 위해 자신과 싸우고 있는데, 부모는 상훈 씨를 키우기 위해 자신과 싸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상훈 씨는 부모를 어디 있느냐고 찾겠지만 부모는 오히려 그럴수록 더 어두운 곳으로 숨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상훈 씨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부모를 만나기 위해 자신을 부모의 뜻대로 봉헌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로 나아가는 유일한 방법은 매일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봉헌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기도를 따로 하지 않아도 이미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상훈 씨와는 반대로 우리 부모가 되어주시기 위해 매일 당신 외 아드님을 십자가에 죽이십니다.
그래야 우리 양식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양식을 주지 않는 부모는 없습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주는 양식은 부모의 살과 피입니다.
이런 분께 나의 모든 것, 나 자신을 내어 맡기지 않으면 나는 믿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나눌 줄 아는 사람이 되기 위해 조금씩 더 주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분 앞으로 나아갈수록 나는 더 나눌 줄 아는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그분으로부터 수백, 수천 배의 상을 받습니다.
바로 하느님을 가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