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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2월 22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2-02-22 조회수 : 1512

성당에 안 와도 전화 한 통 없는 공동체가 정상일까?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당신께 대한 믿음을 고백하는 베드로 위에 교회를 세우시는 내용이 나옵니다.
베드로 사도좌, 곧 교황권에 대해 묵상하는 날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 위에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교회란 ‘모인다’라는 말에서 온 단어입니다. 베드로가 모임의 구심점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며 하느님 나라 열쇠를 주십니다. 성사를 의미합니다. 
성사가 없다면 성당으로 모일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베드로와 성사 중심의 교회가 되었습니다. 
이는 미사가 성당에 오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되게 했습니다.  
 
가족이 그렇습니다. 
일반적인 가족은 아버지가 돈을 벌어오고 어머니가 그것을 받아서 자녀를 양육합니다.
그러면 자녀들은 형제들과 사이좋게 지내는 법을 배워 세상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예수님이 아버지시다면 베드로는 어머니입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양식으로 자녀들을 먹이고 자녀들이 서로 사이좋게 지내도록 가르칩니다.
이것이 정상적인 교회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 교회가 가족과 같은 공동체의 모습을 지니고 있을까요?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양식을 먹으러 성당에 오나요?
예비신자가 세례를 받고 성당에 빠지더라도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는 시스템이 되었습니다. 
 
새 신자가 5년 이내에 70% 정도가 냉담자가 되는 상황입니다.
이는 부모가 아기를 낳고 5년 이내에 70%의 자녀를 가출하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가출한 아이를 누구도 신경 쓰지 않습니다. 정상적이지 않습니다.  
 
또 자녀들은 부모의 음식을 먹고 위해 자주 집에 들어올까요?
몇 년 전 통계를 보았을 때 개신교는 주일 예배 참례율이 85% 정도였습니다. 
이때 천주교는 30% 이하였습니다.
물론 코로나가 시작되기 직전에도 20%가 안 되는 수준으로 떨어졌습니다. 
 
우리는 주일미사를 빠지면 고해성사를 해야 하고 개신교는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왜 개신교 신자들은 주일 예배에 빠지지 않고 천주교 신자는 고해성사의 부담에도 불구하고 미사에 빠질까요?
제 생각은 조직체계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 생각됩니다.
가족공동체의 모습을 잃은 것입니다.  
 
개신교는 예배에 나오지 않으면 그 사람에게 전화하고 심지어 집까지 찾아갈 그 사람이 속한 소공동체가 명확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누가 미사에 나오는지, 나오지 않는지 상황파악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개신교 신자들은 자꾸 자신을 귀찮게 하는 사람들이 싫어서 천주교에 온다고 합니다.
천주교는 미사에 빠져도 간섭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간섭하지 않는 게 좋은 것일까요?
혹시 서로에게 무관심한 시스템 안에 사는 것은 아닐까요?
집에 자녀가 들어오지 않으면 가족이라면 적어도 전화라도 걸어보지 않겠습니까?  
 
일본 영화 ‘서바이벌 패밀리’(2018)의 내용을 한 번 볼까요?
가족이 진정한 공동체가 되어가는 과정을 말하고 있습니다. 
도쿄에 거주하는 평범한 스즈키 가족이 있습니다.
수다쟁이 엄마 미츠에는 생선도 무서워서 자르지 못합니다.
항상 불만 불평을 달고 사는 아빠 요시유키는 게을러서 가족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아들 겐지는 가족과 한마디도 하지 않습니다. 딸 유이는 외모와 친구가 최우선입니다.
가족을 위해 역할을 제대로 하지 않는 완전히 개인주의 가족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정전이 일어납니다. 
스즈키 가족이 사는 아파트만이 아니라 도쿄 전체, 일본 전체에 벌어지는 대규모 정전사태입니다. 
원인은 알 수 없습니다. 
도심은 혼란에 빠집니다.
더는 먹을거리도 물도 없는 도쿄를 벗어나야 하는 상황입니다.
결국, 도쿄를 탈출해서 할외할아버지가 계신 가고시마로 향하기로 합니다.
그러나 비행기를 타는 것은 불가능하여, 결국 자전거를 타고 먼 여행을 시작합니다.  
 
시간이 갈수록 식수와 식량이 점점 부족해집니다.
이때 생선도 못 썰던 어머니가 나서서 비싼 생수의 값을 흥정하며 어머니의 역할을 해나갑니다.
이때 고양이 통조림과 같은 것을 먹으며 연명하는 자신들과는 달리 캠핑 나온듯한 가족을 만납니다.
아버지의 엄청난 지식으로 생수를 얻고 음식까지도 맛있게 해 먹으며 다닙니다.
가족들은 이 가족과 비교되는 자기 가족의 아버지를 원망합니다.  
 
아버지는 자기 가족들의 배를 불리지 못하는 자신을 한탄하며 음식을 먹기 위해 자존심을 버리고 사람들 앞에서 무릎을 꿇습니다. 
그리고 뗏목을 만들어 가족들이 강을 건너게 하며 자신은 물속으로 가라앉습니다.
아버지가 없는 가족들은 들개들에게 쫓기며 죽을 신세가 됩니다.
다행히 증기 기관차에 올라탈 수 있었고 길에 쓰러져있는 아버지를 발견합니다.
그들은 지친 아버지를 자신들의 무릎에 뉘고 쉬게 합니다. 
 
우여곡절 끝에 가고시마에 도착해 외할아버지와 농사를 짓고 물고기를 잡으며 잘 살아갑니다.
아이들도 성장하며 부모님을 돕습니다.  
 
몇 년 뒤 다시 전기가 들어오고 가족들은 이전의 생활로 돌아옵니다.
아이들은 더는 인스턴트 식품을 먹지 않고 어머니가 해 주시는 고등어 조림을 먹습니다.
아버지도 일을 열심히 하여 부지런히 가족을 부양합니다. 
진정한 가족공동체가 된 것입니다. 
 
그들이 여행하면서 자기 일을 도와주며 살자고 한 혼자 사는 할아버지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 할아버지는 가족이 그리웠던 것입니다. 
가족을 위해 자기의 역할을 하는 것이 힘들지만 가족이라는 공동체에서 오는 행복이 얼마나 큰지 알게 해 준 외로운 할아버지였습니다.  
 
공동체는 사회와는 다르게 이익집단이 아닙니다. 그 공동체가 이루는 하나의 유기체를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유기체는 각자의 지체들이 한 몸을 살리기 위해 각자의 역할을 담당합니다.
물론 각 지체는 한 유기체에서 영양분을 얻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교회 공동체를 이런 형태로 이해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이고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지체입니다”(1코린 12,27)라고 말합니다.
또 “우리가 한 몸 안에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지만 그 지체가 모두 같은 기능을 하고 있지 않듯이,
우리도 수가 많지만 그리스도 안에 한 몸을 이루면서 서로서로 지체가 됩니다”(로마 12,4-5)라고 합니다.
지체는 몸을 유지하기 위한 각자의 역할을 해야합니다.
손과 발, 위와 심장, 뇌는 한 몸에서 영양분을 공급받고 그 몸을 위해 자신의 역할을 다합니다.  
 
그러나 그 역할을 하는 것은 귀찮은 일입니다. 우리 안에 그 역할을 하기를 거부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교회는 전기를 끊어줌으로써 각자가 역할을 하지 못하게 만드는 마음에서 돌아서게 합니다.
교회는 위 영화에서처럼 모든 신자를 회개시켜 각자의 위치에서 그 역할을 충실히 하도록 이끌어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형성되는 것이 작은 공동체들입니다. 이러한 공동체를 ‘기초공동체’라 불러왔습니다.
친교 모임은 어울리고 싶어서 원하는 사람들끼리 모이는 공동체입니다.
반면 기초공동체는 한 거대한 유기체를 구성하는 몸의 지체와 같은 공동체입니다.
한 몸을 위해 각자의 역할을 하는 공동체인 것입니다.
손이나 발, 눈이나 간과 같은 기관들이 이러한 기초공동체입니다.
그런데 그 기초공동체는 세포라는 단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다 같은 세포지만 각자의 위치에서 각자의 역할을 하는 공동체에 속한 것입니다.  
 
한국 교회는 이런 기초공동체를 ‘소공동체’라는 시스템으로 운영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소공동체는 기초공동체의 모습을 잃었습니다. 
친교 모임에 가깝습니다.
나오고 싶은 사람은 나오고 나오기 싫은 사람은 나오지 않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아무리 소공동체를 잘해보려 노력한들 이 공동체가 본래 추구하는 모습을 찾을 수는 없습니다.
교회 자체가 소공동체를 기초공동체로 보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소공동체를 다시 살리려면 마치 레지오의 주회합처럼 여기는 시각의 회복이 필요합니다.
주회합에 들지 않으면 레지오 단원이 될 수 없는 것처럼 소공동체에 참여하지 않으면 교회의 일원에서 제외하기 위한 선을 확실히 그을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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