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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2월 20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2-02-20 조회수 : 1706

용서하고 싶다면: 그리스도 없이는 용서도 사랑도 안 되는 이유 
 
 
오늘 복음은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원수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먼저 용서해야 합니다.
분명히 나에게 잘못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 말씀만으로는 우리 힘으로 용서와 사랑이 가능한 것처럼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 오실 이유가 없으셨을 것입니다. 
용서와 사랑은 그리스도 없이는 절대 불가능합니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루카 6,37) 이것은 진리입니다.
이 말씀은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루카 6,37)와 같은 말입니다.
우리는 모두 이것을 잘 압니다. 
주님의 기도에서도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라고 기도합니다.
내가 다른 이의 죄를 용서하지 않으면 나도 용서받지 못함을 우리는 매번 주님의 기도에서 되새깁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남을 심판하지 않나요? 알면서도 남을 심판합니다.
안다고 절대 해결될 일이 아닙니다. 
법은 그 법을 제정한 주체가 언제든 그 법을 어길 때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위치에 머물러야 지켜집니다. 
인간의 원죄 성향이 그토록 큽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 사제들이 당시 율법을 다 외우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가장 중요한 사랑과 자비는 외면하고 있었던 것과 같습니다.  
 
만약 그리스도께서 우리 옆에 계신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우선 나의 거울이 되어주셔서 내가 죄인임을 깨닫게 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루카 6,41) 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무리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더라도 그리스도라는 거울로 내 눈 속의 들보를 보지 못하면 용서할 수 없습니다. 
 
영화 ‘밀양’(2007)에서는 아무리 그리스도를 믿어도 자신도 자기 아들을 죽인 유괴범과 다를 바가 없음을 보지 못한다면 용서할 수 없음을 잘 보여줍니다.  
 
영화 ‘기억의 밤’(2017)에서 이것이 잘 표현됩니다. 
재수생 동생은 대학생 형과 매우 사이가 좋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재수생 동생은 어떤 사고 이후로 계속 기억이 지워지는 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형은 친형이 아니라 그 동생에게 부모님이 살해되어 원수를 갚으려는 사람입니다.
성장하여 원수를 찾았지만, 원수는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기억을 되찾아주기 위해 연기자들을 부모님으로 만들고 자신은 형 역할을 하며
동생이 살던 집을 수리하여 기억을 찾아주려 했던 것입니다. 
 
동생은 형을 사랑했지만, 형이 조금씩 보이는 이상한 행동에 위협을 느낍니다.
심지어 부모도 이상합니다. 
자꾸 자신을 아들이라 여기는 것 같지 않습니다.
이 불안함 속에 집을 탈출합니다. 
그래서 들어간 곳이 경찰서입니다.  
 
경찰서에서 자기 가족이 자기를 죽인다고 말합니다. 경찰은 이 사람이 조금 이상한 것을 알고는 나이를 묻습니다.
그는 재수생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이미 40대의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경찰이 거울 좀 똑바로 보라고 말합니다. 
거울을 들여다본 그는 깜짝 놀랍니다.
자신이 생각했던 그 모습이 아니라 잊고 싶은 기억을 지워버렸던 살인자의 모습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거울이 되어 그 사람이 지은 죄나, 내가 지은 죄가 오십보백보임을 알게 해 주십니다. 
자신의 눈의 티를 보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더는 다른 사람을 심판할 수 있는 지위에 있지 못하다는 것을 알게 되고 원수도 용서합니다. 
 
예수님은 음탕한 마음으로 바라보기만 해도 간음하는 것이라 하십니다. 
나도 화를 내며 살인을 저질렀습니다.
예수님만 동행만이 내가 감춰두었던 내 눈의 들보를 보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내 죄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심판할 수 없는 사람이 되면 사랑할 수 있을까요? 미워하지 않는 것과 사랑하는 것은 차이가 있습니다.
미운 사람에게 보복하지 않는다고 사랑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랑하려면 사랑하려는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이 의지는 원수도 사랑할 수 있다는 믿음에서 나옵니다.
이 믿음은 내 안에 들어와 계신 그리스도 덕분으로 가질 수 있습니다.  
 
고정원 씨는 연쇄살인범 유영철에게 어머니와 아내, 외아들을 잃었지만, 유영철을 용서하고 자기 양자로 삼은 사람입니다.
이렇게 할 수 있었던 힘은 본인에게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가 자살을 생각하며 아내가 다니던 성당에서 울고 있을 때 한 신자의 선교로 루치아노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아 새로 태어났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그는 세례를 받고 성체를 영하며 누구도 할 수 없는 용서의 길을 갈 수 있겠다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라면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 유영철의 다른 피해자 가족들은 어떻게 그런 인간을 용서할 수 있느냐며 고정원 씨보고 미쳤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성체성사의 힘입니다. 내 안에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는데 불가능한 일이 있겠습니까?
고정원 씨는 자기 4대 독자 아들을 죽였으니, 이제 유영철보고 자기 아들이 되어달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옆에서 동행하는 것을 넘어서 이제 내 안에 계신다고 믿어야 용서에서 멀고 먼 사랑의 길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 경지가 대단하기는 하지만 이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고정원 씨는 유영철을 위해 사형 폐지 운동을 벌였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그 사람도 주님을 믿어 나와 함께 천국에 살도록 그리스도를 전해야 합니다.
『꽃들에게 희망을』에서 나비가 된 애벌레는 다른 애벌레들도 자신처럼 나비가 될 수 있음을 믿습니다.
자신처럼 나비가 되도록 목숨을 다해 그들에게 믿음을 전해줄 수 있다면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피조물 안에서 하느님의 모습을 발견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내가 의지적으로 그리스도와 동행함을 믿으려 했고, 또 의지적으로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분과 하나임을 믿으려 한 것과 마찬가지로 완전한 사랑에 이르려면 이제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해야 합니다.  
 
태양이 없는 곳에서 태양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가정해봅시다.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미래에 핵전쟁이 벌어져 온 하늘이 분진으로 검게 닫힌 상태를 생각하면 좋을 것입니다.
태양이 도달하지 않아 땅은 황폐해지고 먹을 것이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벽돌 사이로 잡초가 하나 자라고 있는 것을 본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요?
태양이 다시 비치고 있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잡초 안에는 태양의 빛과 열이 들어있습니다.
그래서 잡초를 보면 태양이 보입니다. 
이는 먼저 내 안에 태양을 바라고 믿고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보입니다.
태양을 알지도 못하고 바라지도 않고 사랑하지도 않는다면 잡초만 보일 뿐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자신 안에 하느님이 계심을 믿는 사람은 이제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하게 됩니다. 
모든 식물과 동물이 태양이 없으면 생존할 수 없음을 알아서 모든 생물 안에서 태양을 발견하듯, 하느님의 성자와 성령께서 창조하지 않으신 피조물이 존재하지 않기에 당연히 우리는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볼 수밖에 없습니다. 
 
더군다나 이 삼위일체 모습을 지닌 인간을 볼 때는 어떠할까요? 그 사람이 원수라도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그 사람 안에서도 사랑하는 하느님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순간에 이를 수 있는 수준은 아니지만 불가능한 수준도 아닙니다.  
 
 ‘마리아 고레티’ 성녀는 갓 10살이 넘은 나이에 자신을 수십 차례나 찔러 온몸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가면서도 그를 용서하겠느냐는 고해 사제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그 사람을 용서할 뿐 아니라, 그 사람과 함께 천국에서 살고 싶습니다.” 
 
이렇게 그리스도를 더 사랑하고 더 가까이 계심을 믿을수록, 그 친밀한 정도에 따라 용서와 사랑의 크기가 달라집니다.
우리 사랑은 율법이 아닌 그리스도의 존재와 그분에 대한 사랑으로만 증가합니다. 
이를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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