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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2월 17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2-02-17 조회수 : 1876

신앙고백도 자격이 필요하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의 신앙을 조사하십니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세례자 요한이라고 하고 엘리야, 어떤 이들은 그냥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나서서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하고 대답합니다. 
 
확실히 성령을 통해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당신에 관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하게 이르십니다.
제자들은 그 이유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면 뭐하러 제자들을 뽑으신 것입니까?  
 
예수님은 곧이어 당신이 많은 고난을 받고 유다 지도자들에게 배척을 받고 죽임을 당해야 함을 선포하십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합니다. 
그런 일은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라고 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그래서 내가 누구인지 말하지 말라고 한 거야!”란 뜻입니다.  
 
어떤 사람이 저에게 “신부님, 사랑해요!”라고 말할 때 이 말은 진실일까요? 아마도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저도 어떤 분들에게는 그런 말을 하지 말라고 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이제 저를 가르치려고 합니다. 
자기 뜻대로 좌지우지하여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일의 도구로 사용하려고 합니다.
사랑한다고 할 수 있지만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상태에서는 사랑이 사랑이 아니게 됩니다.  
 
똥파리의 양익준 감독이자 배우가 ‘오은영의 금쪽 상담소’에 나와 공황장애 13년 차의 괴로움을 상담받았습니다.
그는 초등학생에게까지 극존칭을 쓰며 사람들을 만날 때는 “저는  X 밥이에요”라고 자신을 소개할 만큼 사람들 앞에서 한없이 자신을 낮추는 사람입니다. 
이것도 하나의 신앙고백입니다.
“저는 아주 작은 사람이고, 그래서 당신을 높여드립니다”라는 표현입니다.  
 
하지만 여러분들에게 양익준 감독이 그렇게 자신을 낮추면 그 모습이 진실하게 보일까요?
양익준 감독은 그러면서도 세상 사람들이 자신을 너무 만만하게 보는 것에 대한 불만이 있습니다.
학생 때는 다른 사람과 싸우던 아이가 조용히 앉아있던 자신의 머리를 의자로 내려치는가 하면,
아무 잘못도 없는데 사람들이 다가와 자신에게 심한 욕설을 퍼부은 적도 있다고 합니다.
이런저런 상황으로 공황장애가 오고 7년간 약 안 먹고 버티다가 이러다 죽을 것 같아서 6년째 약을 먹고 있는 것입니다.  
 
어제 복음에서 성령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시면 사람이 나무로 보인다고 했습니다.
지금 양익준 감독은 사람이 나무로 보이지 않습니다. 
자신을 해칠 수 있는 사람, 그래서 살기 위해서는 내가 고개를 숙여야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에게 무시당하는 것은 싫은 사람입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성령입니다. 곧 사랑입니다.  
 
영화 ‘똥파리’에는 그의 가정사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방 두 칸에서 할머니, 할아버지를 포함하여 일곱 식구가 살았습니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심하게 구타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유일한 아들이지만 어머니를 보호하지 못하는 죄책감과 아버지에 대한 미움, 어머니의 무기력함에 대한 분노 등이 가슴 깊이 자리했던 것 같습니다.  
 
양익준 감독은 아버지와 같은 폭군이 되기보다는 어머니와 같이 온순한 모습으로 세상을 살아갈 것을 결심한 것 같습니다.
아버지는 곧 세상입니다. 
자녀가 아버지를 보는 모습이 곧 세상을 보는 모습입니다.
양 감독에게 세상은 언제든 자신에게 폭력을 가할 존재입니다. 
자신은 어머니처럼 더 작아지고 불쌍해지면 세상이 자신을 불쌍히 여겨줄 것 같아서 그런 방법을 택했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더 작아지려는 이를 더 잔인하게 짓밟습니다. 
세상 사람들을 나무처럼 만만하게 보아야 합니다.  
 
양 감독이 우선하여서 해야 하는 일은 아버지에 관한 판단을 멈추는 일입니다.
부모를 판단하게 되면 세상 모든 사람을 판단하게 됩니다. 판단하게 된다는 말은 그 사람 위에 올라선다는 뜻입니다.
그러면서 고개를 숙인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런 것과 같습니다.  
 
“신부님, 당신을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그런데 조금만 잘못하면 난 언제든 당신을 심판하고 내쫓을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이미 하느님보다 높은 위치에 올라선 사람입니다.
그렇게 보이지 않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분명 예수님을 하느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라 고백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그리스도를 판단합니다. 
하느님을 심판하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아담도 죄를 이은 이유를 하느님께서 하와를 만들어주셨기 때문이라고 하느님 탓을 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부르더라도 그것은 올바른 신앙고백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을 고백하기 이전에 내가 다른 사람을 판단하면 하느님 위에 서 있지는 않은지 살펴야 합니다.  
 
양익준 감독은 자신의 분노를 똥파리라는 영화에 토해냈고 그렇게 아버지가 그런 사회 환경에서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조금씩 초등학생에게도 극존칭으로 말하는 것을 그만두고 조금씩 세상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완벽한 부모가 있을 수 있을까요? 완벽한 부모는 없습니다. 
그러나 부모는 자신이 할 수 있는 한계 내에서 완전하게 사랑한 것입니다. 
그러니 과거의 일은 과거의 일로 묻어두고 지금 내가 나아가야 할 바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 기억에 묶여있으면 내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고백은 다 헛것이 됩니다.  
 
오은영 박사에게 이런 엄마가 찾아왔다고 합니다. 그 엄마는 아이였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엄마는 아빠의 죽음을 “너 때문에 아빠가 돌아가셨다”라고 아이 탓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자녀를 전혀 사랑하지 않는 엄마였던 것입니다.
그런 엄마 밑에서 자라서인지 자신의 아이만 보면 그렇게 화가 난다는 것입니다.
자신도 엄마처럼 아이를 학대하게 될 것 같다는 것입니다.  
 
오은영 박사는 아이들에게 체벌을 가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합니다. 저도 이것에 동의합니다.
체벌은 아이에게 “너의 영역은 없어!”라고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살은 나의 영역입니다.
그것이 부모일지라도 누군가가 내 영역에 침범하여 나를 아프게 할 수 있다면, 나는 마치 장난감이라도 된 것처럼 한 인격체로서의 자존감을 상실하고 내가 그런 장난감과 같은 존재이니 다른 이들도 장난감처럼 여겨 다리를 부러뜨려도 된다고 여기게 됩니다.
오은영 박사는 그 엄마에게 뼈를 깎는 아픔으로 체벌하고 싶은 마음을 이겨내라고 하였습니다.  
 
9년 뒤에 그 엄마가 찾아왔다고 합니다. 
9년 동안 아이에게 체벌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분노가 끓어오를 때가 많았지만 정말 뼈를 깎는 아픔을 참아내었습니다. 
그렇게 아이를 받아들이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내 안에 사랑이 증가합니다. 
또 그렇게 나에게 상처를 주었던 어머니를 용서할 힘을 얻게 됩니다. 
 
이를 위해서 예수님께서 서로 사랑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먼저 눈에 보이는 사람을 사랑할 수 있고, 그래서 누구도 심판할 수 없는 사람이 된다면 그제야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유다를 많이 판단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유다가 한 번 예수님을 배신한 그 밤에
베드로는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하였습니다. 그리고 누구도 심판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유다를 받아들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나나 유다나 별반 다를 게 없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누구도 심판할 수 없는 수준으로 내려왔을 때 내가 그분을 그리스도로 고백할 자격이 생깁니다.
내가 누군가를 아직 용서하지 못하고 사람을 심판하는 버릇이 있다면 그런 사람은 하느님까지도 심판할 수 있는 사람임을 알고 그런 상태로 신앙고백을 하며 믿음이 있다고 말해서는 안 됨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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