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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2월 15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2-02-15 조회수 : 1590

하느님은 누구에게 먹고살 걱정을 없애시는가? 
 
 
오늘 예수님은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자기들에게 빵이 없다”라고 수군거렸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5천 명과 4천 명을 먹이시는 기적을 하셨을 때 남은 빵의 양을 되새기시며
“너희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고 말씀하십니다. 
말씀은 찾는 이는 빵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하게 하는 사람들은 바로 그리스도를 찾는 이들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주님께 빵을 달라고 청하기도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려는 것은 영적인 ‘양식’, 곧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그래도 먹고 사는 게 중요하니 그것부터 해결되면 주님을 따르겠다고 말합니다. 
물론 금강산도 식후경입니다. 
 
그러나 금강산을 안내하는 사람이 굶기고 금강산을 구경시키겠습니까? 항상 순서가 바뀌어서 문제입니다.
밥에 대한 욕망은 탐욕을 자아내서 나를 더럽힙니다. 
예수님은 그 욕망을 없애주시러 오신 분입니다.
물질적인 것은 갖는다고 욕망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더 배고프게 됩니다.  
 
아이들은 내일 걱정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부모를 믿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밥걱정한다면 부모들은 서운할 것입니다.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세상에서 사는 법을 가르쳐주기 위해 밥도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밥걱정하는 아이는 부모에게 그런 것을 배울 마음이 없습니다. 
먼저 밥부터 달라고 합니다. 
 
부모는 가르치려고 하는 것만 받아들이면 밥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합니다.
이런 일들이 하느님과 우리 사이에서도 일어납니다.  
 
식탐을 조절 못 하는 아이는 훈육이 힘듭니다.
‘금쪽같은 내 새끼’에 ‘아이의 폭식을 제지 못 하는 엄마’란 사연이 나왔습니다.
아이는 식탐을 절제하지 못하는데 엄마는 그 식탐을 제지하지 못합니다.
항상 웃는 표정으로 아이에게 모든 것을 허락합니다. 
그 이유는 엄마가 엄마 없이 자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항상 얼굴을 밝게 해야 했습니다. 
자신을 키워주는 이들과 친구들마저 자신을 버리는 것이 두렵기에 항상 얼굴을 밝게 꾸미며 그들의 애정을 붙잡으려고 하였습니다.
엄마는 아이가 자신을 미워할까 봐 모든 것을 허락했던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는 아이에게 아무것도 가르칠 수 없습니다. 
아이의 식탐을 먼저 없애주어야 무슨 가르침이라도 줄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식탐을 없애주어야 하는데 엄마는 이를 위해 미움받을 용기를 내야 합니다.
나 자신을 위해서 아이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세상에서 잘 살 수 있도록 키우는 것입니다.
아이의 배고픔은 엄마의 배고픔입니다.  
 
식탐은 왜 오는 것일까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저는 사제이기에 모든 것을 ‘사랑의 부재에서 오는 헛헛함’이라 말하고 싶습니다. 
사랑으로 채워야 하는 것을 음식으로 채우는 것입니다.  
 
tvN ‘엑소시스트’에 ‘식탐 폭발 어린아이가 된 우리 엄마’로 유튜브에 짧게 올라온 한 38세 어머니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물론 극단적인 예를 일반화하는 것은 문제가 있지만 그래도 사랑의 부재가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는 생각해 볼 수 있는 예일 것입니다.
그녀는 시도 때도 없이 두 살배기 아이처럼 응석을 부리고 먹는 것에 집착합니다.
그만 먹으라고 하는 제작진에게 주먹을 휘두르기까지 합니다.  
 
그녀도 자신이 이렇게 된 이유를 압니다. 
그 이유는 결혼한 첫날부터 아이 셋을 낳으면서 하루도 빠짐없이 남편에게 구타를 당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어렸을 때도 분명 무슨 상처가 있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당연히 받아야 하는 사랑을 받지 못했을 때 오는 것은 헛헛함입니다. 
그 이유는 사랑은 밥에 담겨오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부족하면 밥이 땅기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 사랑을 찾지만 없습니다.
그래서 더 먹어보는 것입니다. 
저는 식탐이 그래서 온다고 생각합니다.  
 
하느님을 당신의 아드님을 세상에 양식으로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양식이신데 ‘영’(靈)이십니다.
하느님은 영이십니다. 
눈에 보이지 않고 우리 몸을 살게 하실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당신 말씀이신 성자를 육체와 결합하시어 우리에게 보내셨습니다.
육체를 입어 우리에게 오셨다는 말은 육체까지도 책임지시겠다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선물을 주시는 방식은 항상 그렇습니다.  
 
따라서 영적인 양식을 바라는 이들이 육체까지 걱정할 필요 없게 됩니다.
그리스도는 밀떡과 포도주 안에 담겨 우리에게 오십니다. 절대 영으로만 오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육체가 먼저 만족하지 않으면 영적인 것은 배우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식탐에 찌든 아이처럼 육체적인 것만 걱정한다면 그 안에 담긴 영적인 의미를
어떻게 깨우칠 수 있겠습니까? 위 예에서 아이는 엄마를 육체적으로만 배를 불려 줄 수 있는 대상으로 여깁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당신의 영적인 양식을 먹어 영혼을 건강하게 하려고 물질적인 것은 걱정하지 말라고 말씀을 하신 다음 수천 명을 먹이신 것입니다. 
세상 걱정하는 사람에게 말씀은 스며들지 못합니다.  
 
켈커타의 사랑의 선교회 모원에 사는 300여 명의 수련 수녀들이 음식이 없어 모두 굶게 생긴 일이 있었습니다.
주방 담당 수녀는 마더 데레사에게 사정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는 마더 데레사가 몇몇 후원자들에게 전화해서 도와달라고 할 줄 알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마더 데레사는 여러 사람을 만나는 중이었으며 그 어린 수녀에게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자매가 이번 주 주방 담당인가요? 그렇다면 경당에 들어가서 예수님께 먹을 것이 없다고 말씀드리세요.
그 문제는 해결됐군요. 
그럼 다음으로 넘어가지요.” 
 
그리고 십 분 후 현관 초인종이 울렸고, 처음 보는 어떤 남자가 서류철을 들고 마더 데레사를 찾는 것이었습니다.
수녀님을 보자 그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데레사 수녀님, 공립학교 교사들이 파업에 돌입했다는 소식이 지금 막 들어왔습니다.
수업이 취소되어서 7,000개의 점심 도시락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도시락을 처리하게 도와주시겠습니까?” 
 
‘안나의 집’을 운영하며 매일 수백 개의 식사를 준비해야 하는 김하종 신부는 하루하루가 기적이라고 말합니다.
돈도 그렇지만 짜놓지도 않았는데 그때그때 적절하게 봉사자들이 와 주는 것을 보는 것이 기적이라고 말합니다.  
 
하느님은 일단 우리가 먹을 걱정이 해결되지 않으면 가르치실 수 없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당신 가르침과 함께 항상 먹을 것도 주십니다. 먹고살 것은 주님 뜻에 맡깁시다.
그리고 말씀을 배우고 하느님 나라에 사는 법을 익히기 위해서만 노력합시다.
그러면 먹을 것은 항상 그 말씀과 함께 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은 밥과 함께 옵니다. 
그러니 밥을 먼저 찾지 맙시다. 
사랑이 고픈 것입니다.
사랑을 찾으면 밥도 따라옵니다.
사람이 빵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말씀으로 사는데 말씀은 빵에 담겨 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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