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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2월 11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2-02-11 조회수 : 1659

말하는 이의 나이가 말의 품격을 좌우한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치유해 주십니다.
그들은 손을 얹어 치유해 달라고 청하지만, 예수님은 그를 군중 밖으로 데리고 나가신 다음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고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신 다음 “에파타!” 곧 “열려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그의 귀가 열리고 입이 열렸습니다.  
 
분명 말에는 그 힘의 차이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하는 말은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이 하는 말은 사람을 살리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에파타!”라는 한 마디는 사람을 살리는 힘을 지녔습니다.
우리도 사람을 살리는 말을 하고 싶지만, 어쩐지 자녀들은 부모의 말에 상처를 받는다고 하고
부모도 자녀의 말에 상처를 받습니다.  
 
세상에는 차갑고 날카로운 칼과 같은 말에 찔려 생명을 잃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떤 아파트 주민은 경비원 아저씨에게 “개처럼 짖어봐!”라고 하며 그런 분을 죽음으로 몰아가기도 합니다. 
왜 우리는 타인의 소리를 듣지 못하고 나의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멜 깁슨이 나오는 영화 ‘포에버 영’(1992)의 주인공 대니얼은 공군 조종사로서 남부러울 것 없는 사람이지만, 사귀는 여인에게 결혼하자는 말을 그렇게도 못합니다.
폭탄을 투하하는 용감한 군인임에도 결혼하자는 말 하나 그렇게 투하하기 힘든 사람입니다.
그 얘기만 하면 갑자기 목이 굳어지고 혀가 뻣뻣해져서 딴소리만 하는 꼴이 되고, 그저 매일 ‘내일은 꼭 해야지’하는 한심한 상황입니다.  
 
그러나 비극적인 사고가 발생합니다. 
헬렌이 교통사고를 당해 죽기 일보 직전이 된 것입니다.
대니얼은 할 말을 못 한 채 혼자 세상에 남았습니다. 
헬렌이 죽는 것을 볼 수 없었던 대니얼은 더는 견디지 못하고 친구가 비밀리에 실시하는 냉동 인간 실험에 참여합니다.
어찌어찌하여 대니얼이 깨어난 것은 50년이 지난 1992년이었습니다.
물론 노년에 헬렌이 살았음을 알고 그녀를 만나 사랑을 고백하지만, 왠지 너무 늦은 느낌입니다.  
 
그런데 왜 50년 뒤의 대니얼은 뒤늦게나마 사랑을 고백할 용기를 얻을 수 있었을까요?
50년 뒤에 깨어난 그는 당시 어른들과 어울리기에는 철부지 어린이와 같은 지식밖에 가진 게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를 이해하고 놀아주는 사람은 어린이들밖에 없었습니다.
그의 수준이 50년이 지났는데도 어린이처럼 낮아졌다는 것입니다. 
더 잃을 게 없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처음 대니얼이 결혼하자는 말을 꺼내지 못한 것은 ‘자존심’ 때문입니다. 
그 자존심을 버리지 못하여 50년을 잃어버렸습니다.
자존심은 곧 교만입니다. 
어른이 되면서 가지게 된 것입니다. 
아이들은 자존심이 없습니다.
부모가 없으면 생존할 수 없는 겸손한 존재입니다. 
이렇게 낮아졌을 때 필요한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폭탄을 투하할 조종사일 때는 교만하여 그 자존심 때문에 타인에게 어쩌면 피해를 주는 말만 하는 사람이었다면, 이제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이가 되었을 때는 더는 잃을 것이 없으므로 힘 있는 말을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병자를 치유하시기 위해 하시는 모든 행위는 바로 하느님의 지위를 내려놓고 작아지고 어려지는 행위라 해석할 수 있습니다. 
작아진다는 말은 순종한다는 말인데,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아버지께 순종하는 참 아드님의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와 물이 곧 ‘성령’입니다.
어린이처럼 작고 겸손한 사람이 되는 이들은 그들이 그 과정에서 흘리는 피와 함께 성령의 힘이 나옵니다.
그런 사람이 말할 때는 그 성령의 힘 때문에 능력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성령은 물로도 표현되고 바람으로도 표현되며 손가락으로 표현됩니다.
오늘 병을 고치시며 하시는 예수님의 행위는 성령으로 치유하시는 상징들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령께서는 우리 귀를 막고 하느님을 찬미하는 말을 하도록 이끄시는 힘입니다.  
 
세계 최초로 서예 크로키라는 장르를 개척한 석창우 화백의 그림 입문 계기는 순전히 아들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서른 즈음 전기 기사 시절에 2만 3천 볼트의 감전사고를 당한 적이 있습니다.
의식을 잃었다가 깨어나 보니 두 팔과 발가락 두 개가 절단되어 있었습니다.  
 
삼십 년이 지난 지금 “두 팔 없는 삶과 두 팔 있는 삶 중 어느 것을 택하겠습니까?”라는 뜬금없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팔 있던 삶 30년, 팔 없는 삶 30년입니다. 
저는 둘 중에 팔 없는 삶 30년이 더 행복합니다.” 
 
지금은 가톨릭 성경을 의수에 붓을 끼워 필사하고 있다고 합니다. 
누가 절망의 그에게 이런 희망의 선물을 주었을까요? 그의 4살 아들이었습니다.  
 
실의에 빠진 그에게 네 살 난 아들이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천진한 표정으로 “아빠, 새 그림 그려줘!”라고 말했습니다.
이런 아들의 말 한마디에 인생이 변화된 것입니다.
아마 아들의 이 한 마디의 힘이 커서 하느님 말씀을 필사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이는 순수해서 아빠를 무작정 믿고 사랑합니다. 그 말이 아버지에게 들려오는 세상과 자아의 부정적인 목소리를 완전히 막아버리고 아들이 원하는 행동을 하게 만든 것입니다.
아들의 말이 아버지를 “에파타!” 하게 만든 것입니다.
내 심장이 먼저 열리지 않으면 누구의 마음도 열 수 없습니다.  
 
작아집시다.
작은 이의 말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많은 CEO가 자신과 함께 일을 사람을 알아보기 위해 사용하는 ‘웨이터 법칙’이란 것이 있습니다.
한 웨이터가 실수로 손님의 양복에 와인을 쏟았습니다. 
“죄송합니다, 손님!” 봉변을 당한 손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 아침 바빠서 샤워를 못 했는데 어떻게 그걸 알았죠? 허허….”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던 IT 업체 CEO인 데이브 굴드는 이렇게 말합니다. 
“실수한 웨이터를 웃음으로 용서하는 것을 보고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었어요.
저는 그와 즉각 거래를 시작했습니다.” 
 
와인 세례를 받고도 상대를 배려하는 말을 한 사람의 말에는 그 사람의 피가 섞여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말은 힘이 있습니다. 
힘이 있는 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은 가슴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 주인 나오라고 해, 너 당장 해고야!”라고 말하는 사람은 그 말에 피가 섞이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자기 자신이나 세상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으로서 일종의 모기나 기생충이라 할 수 있습니다.
폭탄을 투하하며 다니는 사람입니다. 
누구에게도 사랑받을 수 없고 세상을 아름답게 바꿀 수 없습니다.  
 
사람의 품격은 말로 금방 드러납니다. 
어린이처럼 겸손한 자세로 말하느냐, 아니면 큰 어른처럼 상대를 대하느냐에 따라 우리는 그 사람의 품격을 금방 알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사는 사회나 나라가 어떤 모습이 될지도 알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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