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0년대 당시 평균 수명은 30~35세였습니다. 그리고 1900년대는 45~50세가 되었고, 현재는 1년에 세 달꼴로 수명이 연장되고 있습니다. 1800년대, 1900년대 사람들이 50대의 저를 보면 아마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요?
“어이구, 장수하시네요.”
그런데 현대의 사람들은 50대면 한창때라고 하십니다. 지금은 100세 시대라고 하니까요. 분명한 것은 예전보다 더 많은 시간을 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우리에게 늘 시간이 많이 남은 것처럼 생각합니다. 하지만 모두가 장수하는 것은 아닙니다.
갑곶성지에서 봉안당을 운영하며 안치 예식을 하면 다양한 죽음을 목격하게 됩니다. 100년을 넘게 살다 들어오시는 분도 있고, 초등학교도 들어가지 않은 아주 어린 아이도 들어옵니다. 언제 죽을지, 언제 하느님 곁으로 가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입니다.
시간이 많다면서 허송세월하여서는 안 됩니다. 그날과 그때를 모르기에 늘 깨어 준비할 수 있어야 합니다.
헤로데 임금은 자기 자리에 연연하고 있어서 로마와 결탁한 사람이었습니다. 따라서 자신에 대한 소문이 로마에 알려지면 자기 자리에서 쫓겨나지 않을까 염려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동생 필리포스의 아내 헤로디아와 혼인한 것으로 문제 제기를 세례자 요한이 했던 것이지요. 자기 부인을 내쫓고 동생의 아내를 자기 아내로 삼는 것은 율법에 어긋난다면서 고발한 것입니다. 이 사실에 군중이 동요되어 폭동으로 이어지면, 로마로부터 외면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요. 그래서 세례자 요한을 감옥에 가두었고, 마침 헤로디아의 농간으로 헤로디아 딸의 춤값으로 세례자 요한의 목을 내어 준 것입니다.
헤로데 임금도 자기 잘못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권력을 잃을 것 같은 두려움에 해서는 안 될 결정을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 소문을 듣고는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되살았구나.”(마르 6,16)라며 큰 두려움을 갖게 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다윗왕을 꼽습니다. 그의 삶에 잘못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온 마음을 다해 찬미의 노래를 부르고 자신을 지으신 하느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존경하는 것입니다(집회 47,8 참조).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께 충실한 사람은 올바르게 살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하느님께만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도 존경과 사랑을 받는 이유가 됩니다. 헤로데 임금은 정반대였습니다. 오로지 순간의 만족만을 위해 살았고, 하느님 뜻보다는 자기 뜻을 내세우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 결과는 두려움이었습니다.
지금 우리의 모습은 어떤가요? 아직도 시간이 많다면서 나만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닌가요? 주님 뜻인 사랑을 실천하며 언제 올지 모를 그날과 그때를 준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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