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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2월 3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2-02-03 조회수 : 1396

봉사자를 자르지 못하는 사제가 결단력 있는 사제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둘씩 짝지어 파견하시는 내용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느님 안의 한 가족 공동체를 형성하라는 명령을 받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파견하시는 제자들은 성직자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 주목하고 싶은 내용은 이것입니다. 
“어디에서나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고장을 떠날 때까지 그 집에 머물러라.”(마르 6,10) 
 
만약 사제가 한 성당에 발령받아 갔다면 그 사람을 맞이하는 집은 누구를 의미할까요?
함께 사목하는 협조자들로 보입니다. 
수녀님이 될 수도 있고 사목회 위원, 단체 봉사자들이라고 해도 될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사제가 협조자들을 함부로 바꾸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 됩니다.  
 
봉사자가 잘못하는데도 사제가 가만히 놔둬야 할까요? 예수님은 그래도 그게 좋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도 배신을 당하면서까지 가리옷 유다를 당신 봉사자로 그대로 두셨습니다.  
 
왜 한 번 뽑은 봉사자를 끝까지 책임져야 할까요? 봉사자를 자르면 사제의 ‘아버지’로서의 모습을 잃기 때문입니다.
사제는 아버지입니다. 봉사자는 어머니라 할 수 있습니다. 
사제가 어머니를 함부로 대한다면, 심지어 바꿀 수도 있는 사람이라면, 신자들은 그 사제를 아버지로 대할 수 있을까요?
그냥 직장 상사처럼 두려운 존재가 됩니다. 그러면 전하는 복음이 모순에 부딪히게 됩니다.
복음은 하느님 안에 우리가 한 가족이 되었다는 것인데, 실제 모습은 직장 상사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KBS ‘안녕하세요’에 부모님이 너무 싸워서 불안에 시달리는 아이들과 그 부모들이 나온 적이 있습니다.
어쩌면 특별한 사연은 아니고 우리 가정의 보통 자주 싸우는 집의 경우입니다.  
 
아빠는 술을 많이 마시는 사람이었습니다. 
두 딸은 아빠가 술 때문에 엄마와 싸우니까 술 좀 그만 마시라고 각서까지 쓰게 했습니다. 
아빠는 그저 밖에서의 삶이 쉽지 않아 술을 마시고 장난을 치는 것인데도 아이들은 큰 상처를 받고 있었습니다. 
아내가 말합니다.  
 
“저도 집에서 노는 사람도 아니고 저도 일을 하거든요. 돌아와서는 집안일도 하고 애들도 키워야 합니다.
그러나 남편은 매일 술만 마시고 늦게 들어와서는 술 좀 적당히 마시라는 이야기만 하는데도 지킨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또 술을 먹든 안 먹든 자꾸 이렇게 못생겨서 어디에 내놓겠냐는 둥 외모 지적을 합니다.
딸아이들에게도 그렇게 합니다.  
 
취중 진담이라고 하면서. 또 잘 이야기를 못 알아들으면 땅끝까지 저를 무시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싸움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지 않습니까?”
외모 지적을 왜 하느냐는 말에 남편이 말합니다. “아니, 아내가 돼지같이 살찌면 안 좋잖아요.” 
 
아빠는 집에서 무한 권위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언제든 엄마를 갈아치울 수 있다는 느낌을 자녀에게 줍니다.
자녀는 자신이 사랑하는 엄마를 언제든 칼로 칠 수 있는 아빠 때문에 어떤 마음으로 크게 될까요? 
초등학교 3학년 둘째 딸도 이렇게 말합니다.  
 
“아빠, 나빠요. 술 취해서 머리 때리고 못생겼다고 하고. 엄마가 가슴을 치며 ‘숨 좀 쉬자. 안 그러면 힘들어서 죽을 것 같아’라고 말해요. 
슬퍼요. 엄마가 이혼하자고 한 적이 많아요. 
싫고 무서워요.” 
 
이 집에서 아빠는 무소불위의 권위를 행사하고 자녀들에게 언제든 엄마와 헤어질 수 있다는 마음을 주었습니다.
그러면 아빠는 외로워질 수밖에 없고 자녀들은 어긋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불안한 가정에서 자란 자녀는 어떤 모습이 될까요? 
 
일단 결혼했다면 나에게 맡겨진 사람들은 주님께서 맡겨준 사람이라 여기고 자기 마음대로 바꾸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가끔은 사제는 권위적이어야 한다고 여기며 봉사자들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만두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결단력 있는 아버지의 모습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습은 신자들에게 보기도 안 좋고 결단력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결단력이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한 집에 들어가 그 한 집에서 머물 줄 아는 사람이 결단력이 있는 것입니다.
그 결단력으로 이런 행동도 보입니다.  
 
“어느 곳이든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으면, 그곳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밑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마르 6,11) 
 
가족은 ‘피’로 구성됩니다. 
당연히 하느님 가족의 피와 같은 성령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은 가족일 수 없지 않습니까?
가족에는 분명한 선이 있어야 합니다. 
분명 우리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기도합니다.
‘우리’라는 울타리가 없는 가족은 없습니다. 따라서 가족을 위하는 사람은 가족에게 조금이라도 피해가 가는 상황이 되면 가차 없습니다.  
 
어떤 자매는 혼기가 차서 주위에서 맞선을 보라는 청이 많았습니다. 몇 번 만난 사람과 결혼한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주위 사람들의 청을 못 이겨 어쩔 수 없이 맞선을 보았습니다.
볼 때마다 그녀는 남자가 마음에 안 든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더는 물러설 수 없는 나이가 되자 괜찮다고 여겨지는 남자와 사귀어보기로 하였습니다.
사귀다 보니 가끔 폭력적이고 괴팍한 성격이 드러났습니다. 
그래서 여자는 헤어지자고 했지만, 남자가 무릎 꿇고 사정하는 바람에 남자를 버릴 수 없었습니다.  
 
결국엔 결혼하여 아기를 낳았습니다. 
그러자 본격적으로 남자의 성격이 드러났습니다.
아기를 안아주지도 않고 아내를 본 척도 안 했습니다. 
아내는 헤어지자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남편은 예상했다는 듯이 이미 아내 명의로 되어있는 집을 팔아버린 상태였고 아내는 아이와 함께 어머니 집으로 돌아왔는데 남편에게 양육비 한 푼 받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실제 사례입니다.  
 
위 자매는 헤어지자는 말을 자주 하고 이혼하자는 말을 자주 하였습니다. 
결단력이 있는 사람일까요?
진짜 결단력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입에서 나온 말에 책임을 질 것입니다.
오히려 결단력이 부족한 사람이 쉽게 만나고 쉽게 헤어집니다.  
 
제가 오산성당에 부임했을 때 이미 사목회가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전 주임 신부님이 새롭게 구성해 놓은 지 얼마 안 된 상태였습니다. 
그분들은 단체로 일괄사표를 내며 저에게 모든 권한을 위임하였습니다.
저는 그분들을 한 분도 빠짐없이 그대로 재임명하였습니다.
전임 신부님이 해 놓으신 것도 주님께서 맡겨주신 사람들이라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분들은 정말 열심히 사목을 도와주셨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사랑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사랑을 전하는 언제든 나를 자를 수 있는 칼을 들고 있다면 어떨까요?
사랑을 전하고 사랑을 받기는 틀린 것입니다. 그래서 한 번 정해진 봉사자는 그 사람이 가리옷 유다처럼 행동한다고 하더라도 끝까지 책임지는 것이 더 좋은 결과를 냅니다.
한 집을 선택하여 머물면 그곳을 떠날 때까지 그 집에만 머물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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