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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월 29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2-01-29 조회수 : 1260
1월29일 [연중 제3주간 토요일] 
 
마르코 4,35-41 
 
하느님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는 것이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길이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돌풍에 휩싸여 죽을 지경에 있는 제자들을 구원하시는 내용입니다.
돌풍에 배에 물이 가득 찰 때까지 예수님은 고물을 베고 주무시기만 하십니다.
제자들은 배가 가라앉기 직전에서야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라며 예수님을 깨웁니다. 
 
예수님은 바다를 꾸짖어 잠잠하게 하신 다음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죽음에 대해 두려워하는 것은 믿음이 없다는 증거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죽음이 두려워 일어나는 욕구가 ‘생존 욕구’입니다.
그리고 그 생존 욕구의 대표적인 것이 ‘소유욕, 성욕, 명예욕’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우리가 싸워야 할 세 가지 원수라 하여 ‘삼구’(三仇)라 부릅니다.
이 생존 욕구가 살아있는 한 하느님의 뜻, 곧 이웃사랑을 실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한 예로 제가 초등학생 때 성적조작을 해서 선생님에게 크게 혼이 난 적이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저와 다른 아이에게 시험지 점수를 매기는 것을 시키셨습니다. 
우리는 점수를 매기다가 서로 상대의 것을 2개씩 더 맞게 고쳐주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아이는 80점대가 되었고 저는 90점 대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선생님은 우리 두 시험지를 대충 점수를 매긴 상태였습니다.
우리 것을 고치는지 안 고치는지 시험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날이 저의 생일이었는데 낚시 채로 종아리가 시커멓게 맞았습니다. 
 
이런 것이 명예욕 때문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내가 명예를 높이려면 누군가는 나 때문에 손해를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선 내 점수가 우선이니 남이 나 때문에 점수가 떨어지는 피해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권력이나 경쟁에서 이기려는 사람들은 그 자체로 이웃에게 피해를 주며 살아갑니다.
그렇게 사회에서 사랑할 수 없는 본성으로 굳어져 가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살 수 없는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녀가 생존 욕구에 길들어가는 책임은 어디에 있을까요? ‘원죄’ 때문입니다. 
물론 부모의 탓이 있기는 하지만 그 부모도 그렇게 그 부모에게 자랐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죄의 굴레가 되는 것입니다.  
 
 『내 안의 어린아이가 울고 있다』에서 니콜 르페라는 자신이 애인에게 지나치게 집착하게 된 이유가 엄마 때문이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 엄마도 그 이전에 아버지의 죽음 때문에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르페라의 아버지는 가정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매일 정시에 퇴근하였습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도착하기 한 시간 전부터 식사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어머니는 할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자신이 또 생존의 위협이 되는 상황에 놓이게 될까 봐 항상 초조해하였습니다.
다행히 가정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남편을 만나 이런 불안이 많이 해소된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밤 아빠가 올 시간이 지났는데도 아빠는 돌아오지 않고 있었습니다.
30분이나 지났는데도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어린 르페라는 식탁 아래 제일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엄마는 르페라의 존재를 까맣고 잊고 두 손을 비틀며 초조하게 창밖만을 내다보고 있었습니다.
르페라는 자신의 존재가 잊힌 두려움을 세발자전거를 타는 데 집중하며 잊으려 하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이때 받은 상처를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엄마는 무언의 불안감이 점점 더 커지자 자신의 발아래에 있는 작은 생명체(르페라)를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
그 순간, 엄마는 정서적으로 내게 반응하지 못했고, 그 자리에 있지 않아서 나의 욕구나 두려움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아니, 그렇게 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엄마가 불안감과 트라우마 반응에 잠식당해서 당면한 위협에만 집중했을 때 나는 인정받지 못하는 보잘것없는 존재가 되었다.
그와 같은 사소한 사건들을 겪으면서 나는 ‘아무도 내 생각을 조금도 안 해줘’라는 핵심믿음을 구축해갔다.” 
 
르페라의 엄마는 르페라를 상처 주고 싶은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냥 자신의 생존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불안했을 뿐입니다.
다행히 아빠가 오는 것이 보이자 이 모든 상황은 끝이 났지만 르페라가 받은 엄마로부터의 상처는 르페라 역시 생존 문제에 집중하게 만드는 커다란 계기가 되게 했습니다. 
그녀는 이런 사람이 되었습니다.  
 
“나는 그런 순간들을 겪으면서 또 다른 교훈도 얻었다. 내적 동요는 오직 외적 요소로 가라앉힐 수 있다고
믿기 시작한 것이다. 
엄마처럼 나도 안정감을 느끼고 싶어서 아빠를 대신해줄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애인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냈다가 답장을 받지 못하면 불안해서 미칠 것 같았다.
혹은 누군가가 정서적으로 내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싶으면 (극히 오싹한) 두려움이 온몸을 덮쳤다. 
 
절망에 바지고 비이성적으로 되거나 사랑받지 못할 때는 유년기의 그 집에 있는 것 같았다.
또다시 창가에 붙어선 엄마가 보였다.
‘내 생각을 조금도 안 해주는 사람이지만 내가 살아남으려면 저 사람이 필요해.’” 
 
우리는 우리 자신도 모르게 내 생존 욕구 때문에 자녀에게 상처를 주어 그 생존 욕구를 대물림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상태에서는 누군가에게 집착할 수 있지만 참다운 사랑을 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을 해결해주실 수 있는 분은 우리 죽음까지 책임질 하느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다시 사랑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드시기 위해 먼저 생존 욕구부터 해결해주고 싶으셨습니다.
마치 생존에 대한 아무 걱정이 없는 부모처럼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라고 하시며 우리 안에 사십니다. 
 
우리는 생존의 위협을 느낄 때마다 죽음보다 더 강하신 그분을 깨워서 도와달라고 하면 그만입니다.
이렇게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하게 할 수 있게 될 때 비로소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삼구에서 벗어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 생존을 부탁하지 맙시다. 
그냥 그분께 맡기고 오늘을 살아갑시다.
그러면 나도 모르게 이웃을 위해 사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분과 함께 있으며 두려워하는 것은 그분과 함께 있다는 믿음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는 결과로 나타납니다. 
 
우리 안에 예수님을 발견합시다.
그래서 그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신다는 믿음만으로 이미 생존을 보장받은 것입니다.
이것이 성체성사의 가장 중요한 목적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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