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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월 20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2-01-20 조회수 : 1584
1월20일 [연중 제2주간 목요일]
 
마르코 3,7-12
 
내 자유를 지킬 줄 모르면 남의 자유도 인정할 줄 모른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수많은 사람이 밀쳐대자 ‘배 한 척’을 따로 마련하시어 그들 무리에서 조금 떨어지셨습니다.
사람은 받으면 교만해져서 당연히 주님이 주셔야 하는 줄 알고 그분에게 달려듭니다.
하지만 그분은 주시는 분이시지 빼앗기는 분이 아니십니다. 
자유는 한 인간의 존엄성을 위한 가장 큰 요소입니다.
 
따라서 자유가 무시당한다는 것은 존엄성이 무시당하는 것이고 어렸을 때부터 그랬다면 그 사람은 자존감이 낮을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을 존엄한 존재라 믿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지심리학 박사이면서 개인 상담소까지 운영하던 ‘니콜 르페라’는 『내 안의 어린아이가 울고 있다』에서
자신이 육체와 정신적으로 병들어 있는 이유에 대해 말합니다.
그녀는 20대부터 항불안제를 복용하였고 무기력과 피로, 육체적 고통과 공황장애 등으로 매우 어려운 상황에서도 남을 상담해주고 있었습니다. 
그녀가 찾은 이유는 바로 어머니로부터 가스라이팅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외형적으로 이상할 것이 없는 평범한 중산층에서 자랐습니다.
아버지는 안정적인 직장에 다녔고 어머니는 전업주부였습니다. 
가족의 좌우명은 ‘가족이 전부다’였습니다.
하지만 그런 말로 부모는 자녀의 자유를 인정해주지 않고 있었습니다.
가족이 전부가 되기 위해 자녀들의 자유를 희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특별히 어머니는 자신만의 환상 통증에 시달려 여러 날 침대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항상 불안했고 산만했습니다.
삼 남매의 막둥이인 니콜은 전부인 가족을 위해 자신의 감정은 무시하며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부모님은 니콜을 ‘아기 천사’로 불렀습니다. 
니콜은 부모님의 기대대로 모든 면에서 완벽해지려 노력하였고, 외향적으로는 활달했습니다.
 
니콜이 10대에 들어설 무렵 파티에 갔다가 충혈된 눈으로 혀가 꼬인 소리를 하며 비틀비틀 집에 돌아온 일이 있었습니다.
엄마는 ‘설마’ 했지만, 니콜이 써 놓은 글을 보고 술을 마신 것을 알고는 물건을 집어 던지며 울면서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네가 이 엄마를 죽이려는 거구나! 너 때문에 심장병이 도져서 당장 이 자리에서 죽어버릴 것 같아.”
엄마가 심장병 수술을 받은 지 얼마 안 되는 때였습니다.
니콜은 자신의 잘못된 선택으로 어머니가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고 그렇게 또 자기 뜻대로 무언가를 결정하는 권한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니콜의 어머니의 부모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어렸을 때 분명 자유를 침해당했을 것이고 그렇게 자랐기에 자신도 자녀의 자유를 침해해도 된다고 당연하게 여겼을 것입니다.
아직 10대도 아닌데 술을 마신 것에 대해 그렇게 반응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겠지만, 아이들은 나의 선택에 대해 부모가 영향을 받는다는 것에서 ‘경계’가 모호한 인성을 가지며 성장하게 됩니다. 
 
사람 사이에는 ‘경계’가 있습니다. 그 경계를 우리는 ‘자유’라고 부릅니다.
상대의 자유를 강요하는 것은 상대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행위입니다.
다시 말해 상대를 하나의 독립된 인격체로 보아주지 않고 나의 종속된 물건으로 보는 행위입니다.
하느님도 인간에게 죄지을 자유를 허락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가리옷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하고 지옥에 가겠다고 하면 예수님은 말리지 않습니다.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상대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지옥에 가더라도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팔아넘기는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입니다.
자유를 침해당한 사람은 결국 남의 자유를 침해하는 죄를 짓게 됩니다.
우리는 절대로 자녀들의 자유를 침해해서는 안 되고 보장해 주어야 합니다. 
 
제가 유학 갔을 때 처음 말을 배울 때는 인도 신학생과 아프리카 신학생과 함께 방을 쓴 적이 있습니다.
특별히 아프리카에서 온 신학생은 네 것, 내 것 개념이 없었습니다.
빌려달라고 하더니 빌려 간 것들을 하나도 되돌려주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가족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먼저 나의 자유를 목숨 걸고 지킬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자선이나 좋은 일도 절대 남에게 휘둘려서 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배 한 척을 마련하신 이유가 이것입니다. 
 
영화 ‘브레이브 하트’(1995)에서, 주인공 ‘윌리엄 월레스’는 오직, 스코틀랜드의 자유를 위해 높은 이상과 정의로움이 가득한 용감한 심장이 이끄는 대로 살다 죽습니다.
자유가 빼앗기는 것을 눈 뜨고 볼 수 없는 것입니다. 
 
13세기 말엽(1280년)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왕가는 서로 대립하고 있었습니다.
스코틀랜드의 왕이 후계자 없이 죽자, 포악한 이교도로 악명 높던 잉글랜드 왕 ‘롱생크’가 스코틀랜드를 차지하게 됩니다.
스코틀랜드의 귀족들은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서로 싸웠고, 롱생크는 작위와 영토라는 욕망의 미끼로
그들을 조정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잉글랜드의 전제 군주 ’롱생크’는 서서히 스코틀랜드 백성을 무참히 살해하는 등 폭정을 시작하게 되고, 인종청소의 하나로 반항심 강한 스코틀랜드인의 종자를 몰살시키기 위해, 결혼 첫날밤 신부를 잉글랜드 지주가 차지할 권리를 주는 “프리마 노테(초야권)”라는 제도를 부활하여 스코틀랜드 백성에게 큰 치욕과 좌절감을 주게 됩니다.
이러한 금수만도 못한 제도를 피해 마을 청년 ‘월레스(멜 깁슨)’는 사랑하는 처녀 ‘머론’과 비밀 결혼을 올리고
사랑을 키워갑니다.
 
그러던 어느 날 월레스는 자신의 신부를 욕보이려는 군인을 죽이고 달아나게 되고, 급기야 신부는 잉글랜드 군인에게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어릴 적 아버지와 형을 잉글랜드 군인에게 잃은 월레스는 저항군의 지도자가 되어
잉글랜드와 전쟁을 시작하게 됩니다.
월레스는 격자무늬 킬트(Kilt:스코틀랜드의 남자가 전통적으로 착용한 치마형 하의) 복장과 얼굴에는 파란색의 물감으로 강인한 전사의 의지를 채색하고 용감하게 돌격하여 수적으로 절대 우세한 잉글랜드군을 파죽지세로 누르며 점점 ‘롱생크’왕을 압박해 나갑니다. 
 
롱생크왕은 무능한 자기 아들 대신 뛰어난 프랑스 출신 세자빈 ‘이사벨 공주(소피 마르소)’를 파견하여
월레스와의 협상을 시도하라 명합니다. 
이때 영특한 이사벨 공주는 순수하고 열정적인 반군 지도자 월레스의 애국심과 뜨거운 열정에 사랑을 느끼게 되고, 잉글랜드의 간교한 계략(앞으로는 협상을 뒤로는 야습)을 알려줍니다.
잉글랜드의 계략을 알게 된 월리스는 협상 대신 전쟁에서 연승을 거두게 됩니다. 
 
하지만 스코틀랜드 최고의 귀족인 ‘부르스 백작’은 나환자인 자신의 교활한 정치인 아버지의 사주를 받아
백작들을 회유하여, 월레스를 잉글랜드에 바치는 대가로 자신들은 권력과 영토를 나눠 가지게 됩니다.
이런 계략에 속아 평화적 협상을 위해, 귀족 회의에 단신으로 참석한 월리스는 잉글랜드 군인에게 체포되어 런던의 롱생크 왕에게 압송됩니다. 
 
“자비(Mercy)”를 외치며 충성서약을 하면 살려준다는 회유에도 굴복하지 않고 갖은 고문 속에서도 그는
“자유(Freedom)”을 외치며 장렬한 죽음을 맞이합니다. 공개처형 후 그의 사지는 갈기갈기 찢겨서 머리는 런던 다리에 걸렸고, 팔과 다리는 영국의 네 군데 변방에 경고용으로 걸리게 되나, 이를 계기로 분노한 스코틀랜드의 백성들과 귀족들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그의 정신을 이어받아 잉글랜드와 ‘베노번 전투’에서 대승리를 하며 스코틀랜드의 독립을 쟁취하게 됩니다. 
 
나의 경계는 내가 지키는 것입니다. 
물론 자유를 포기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하지만 자유가 먼저 나의 것이 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봉헌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나의 자유를 침해당하는데도 분노하지 않는 사람은 누구의 자유도 존중하지 못하는 사람이 됩니다.
나 자신도 존중하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자유는 그 사람의 존엄성입니다. 
그것을 잃으면 다 잃는 것입니다.
자녀의 자유를 빼앗아서는 절대 안 됩니다.
그리고 나의 자유를 그 누구에게 빼앗겨서도 안 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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