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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월 15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2-01-15 조회수 : 1332
1월15일 [연중 제1주간 토요일]
 
마르코 2,13-17
 
죽기까지 완전한 행복을 추구해야 하는 이유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세리 레위(마태오)를 부르시는 내용입니다. 
이것에 불만을 품은 바리사이파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어울리며 식사하시는 것에 불만을 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르 2,17)
 
우리가 죄인이 되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변하기 위해서는 ‘먼저 한 번은 죄인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의 나의 모습이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죄인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본인들이 잘살고 있는 의인이라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와 함께 머물 필요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서 탕자의 형이 그렇습니다.
 
큰아들은 아버지께 열심히 봉사하는 신앙인이지만 형제들을 죄인으로 심판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아버지와 함께 있는 행복이 아닌 아버지로부터 보상을 바랐던 것입니다.
반면 작은아들은 죄인들의 상징입니다. 
그는 모든 것을 누려보았기 때문에 그 안에 공허함만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니 행복이 아버지와 함께 있는 것임을 압니다. 
 
우리는 어느 쪽에 속합니까? 혹시 우리도 하느님이 지금 옆에 계신다면 약간 불편하지 않을까요?
하늘나라도 우리가 즐길 수 있는 것을 모두 차려놓으시고 하느님은 잠시 출타 중이시면 좋지 않을까요?
그러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그분이 주시는 것으로 행복한 나라가 아니라 그분이 함께 계셔주시는 것만으로 행복한 나라입니다. 
 
2016년 4월 16일 에콰도르 플라야 프리에타에서 발생한 지진으로 33세에 세상을 떠난 아일랜드계 수녀님이 있습니다.
‘클레어 크로켓’ 수녀(Sr. Clare Crockett)입니다. 
 
클레어는 처음부터 유명해지고 싶었고 부자가 되고 싶었습니다. 
물론 그런 길로 가고 있었습니다.
15세 때 이미 영국 유명 TV와 계약을 맺었고 17세 때는 그녀의 재능을 알아본 미국에서까지 러브콜이 왔었습니다.
그녀가 18세 때 수녀원에 들어오기 직전까지도 그녀는 영국에서 영화를 찍고 있었습니다.
고급 호텔에서 자고 고급 레스토랑에서 술을 마시며 담배도 피우고 정결하지 못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한순간 갑자기 수녀원에 입회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갑자기 변할 수 있을까요? 클레어는 17세 때 우연히 스페인 성지순례를 친구와 함께 갔습니다.
당연히 거기에서도 먹고 마시는 파티가 이어질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성지순례였습니다.
성 금요일에 어쩔 수 없이 성당에서 예식에 참가했고 아무 생각 없이 따라 나가 예수님 십자가에 친구 하였습니다. 
 
그때 예수님을 만납니다. 아무도 알려준 적이 없지만 바로 자신의 죄로 십자가에 못 박혔음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한없이 웁니다. 
그녀는 어떻게 보답해야 하는지 생각합니다. 
 
“나를 위해 당신의 모든 것을 주신 그분께, 내가 어떻게 나의 모든 것을 바칠 수 있을까?”
그녀는 바로 수녀님이 되기로 합니다. 
그리스도의 희생을 본 사람은 이렇게 먼저 ‘죄인’이 되고 ‘자기를 봉헌’하게 됩니다.
주님의 뜻에 자기를 봉헌하면서 내가 변화되는 것입니다.
우리를 하느님 자녀로 새로 태어나게 만드는 분은 하느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의 십자가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다시 돌아와 영화를 찍던 그녀는 상태가 더 나빠집니다. 
더 타락한 삶으로 돌아왔습니다.
지금까지 자신이 추구하던 것들이 진짜 행복이 아니었는지 확인하는 것입니다.
갈 데까지 간 그녀는 화장실에서 토하려고 하다가 자신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누군가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분명한 그리스도의 임재를 느낍니다. 
그 십자가의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너는 언제까지 나를 고통스럽게 할 작정이냐?”
 
침실로 돌아온 그녀는 내일 일정표를 보며 밤새 울었습니다. 
그녀는 다 가졌다고 생각했지만, 가슴은 텅 비어있었습니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었습니다. 
주님을 가지지 못했다면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것입니다. 
 
청빈, 정결, 순명을 위해 모든 것을 끊는 것이 두렵기는 했지만, 주님께서 도와주실 것을 믿고 주님에게서 멀어지게 만드는 모든 것을 끊고 수녀원에 입회합니다.
그 이후로도 영화감독이 계속 전화하였지만, 그녀의 마음은 한결같았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재능으로 항상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녀의 슬픈 모습을 본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합니다. 그녀는 말합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나에게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 목숨을 버리고 자기 자신을 잊고 자신에게서 죽는다면 그것이 행복이다.’
이것은 정말 진실입니다. 정말 진리입니다.”
 
수녀님은 그렇게 지진이 났을 때 기타를 가르치고 있었던 아이들을 대피시키기 위해 뛰어다니다
건물이 무너져 계단에서 사망하였습니다. 
 
저도 신학교에 들어오기 전에 화장실에서 클레어 수녀님과 같은 경험이 있습니다.
그 경험이 너무 강렬해서 친구에게 ‘화장실에서 만난 예수님’이란 글을 써 보낸 적이 있습니다. 
 
저의 생일이었고 사람들은 저의 얼굴에 케이크를 묻혀가며 축하해 주었습니다. 
너무나 즐거웠습니다.
케이크를 씻으려 화장실에 갔는데 주님께서 함께 계심이 느껴졌습니다. 
화장실에서 주님께서 함께 계심을 느낀 것입니다.
그리고 밖으로 좀 전까지 나를 축하해 주던 이들은 자기들끼리 재밌게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나를 축하해 주러 온 것이지만 실제로는 자신들이 즐기러 온 것입니다.
군중 속의 고독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클레어 수녀님은 행복을 찾는 사람이었습니다. 처음에는 하느님이 주실 수 있는 것들을 추구했지만
결국엔 그것들이 아무것도 아니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면 방향의 전환이 일어납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다행히 저도 할머니의 죽음으로 ‘행복’을 신조로 삼고 살아왔기에 잠깐이지만 화장실에서 주님과 함께 있었던 행복과 사람들과 함께 있던 행복의 엄연한 차이를 눈치챌 수 있었습니다. 
 
아이들은 온 마음을 다해 행복을 추구합니다. 
그리고 부모님과 함께 있으면 그 행복이 달성됨을 압니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행복만을 추구하지는 않습니다. 행복이라고 믿는 것들을 추구하고 그것도 자주 바뀝니다.
행복을 바라는 것과 행복한 것들을 바라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행복은 목적지인데 행복을 바라는 것들에 눈이 팔려 결국 방향을 잃게 됩니다. 
 
우리는 그리스 신화에 오디세이가 자신들을 유혹하는 사이렌이라는 괴물들을 이기기 위해 어떻게 했는지 알고 있습니다.
자기 귀를 밀랍으로 막아 자신을 유혹하는 사이렌의 노랫소리가 들리지 않게 하고 자신을 배의 기둥에 묶어서 목적지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멈추지 않게 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만나려면 죽기 직전까지 바라는 것이 ‘행복’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행복이 곧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완전한 행복의 기준을 가지지 못하면 세상의 행복이 행복이라 여기며 공허함만 주는 것을 가지고도 자신은 행복하다 착각합니다. 
 
행복한 것들, 곧 돈이나 성, 혹은 명예나 권력이 아닙니다. 
진짜 행복을 추구하면 그것들은 공허하기만 합니다.
완전한 행복을 맛보기 전에는 나의 항해를 멈추지 않겠다고 결심하십시오. 
그래야 길잡이라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과 함께 머무는 것만이 행복임을 믿으십시오.
그러면 작은아들처럼 아버지의 집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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