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14일 [연중 제1주간 금요일]
마르코 2,1-12
치유 기적이 줄어들면 고해성사도 줄어든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중풍 병자를 고쳐주시며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율법학자들은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라고 생각하며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을 모독한다고 여깁니다.
예수님은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라고 하시며 병자를 치유해주십니다.
병자의 치유가 곧 죄의 용서 증거로 사용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 ‘고해성사’와 ‘병자성사’는 서로 믿음을 보완한다는 뜻입니다.
병을 고치는 기적이 정말 고해성사에 대한 믿음을 증가시킬 수 있을까요? 당연합니다.
오상의 비오 신부님께 미사와 고해성사를 하려고 사람들은 성당이 열리기 몇 시간 전부터 기다렸습니다.
사람들은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이 죄를 용서해주면 더 완전히 용서받는다고 여깁니다.
누구에게 고해성사를 받아도 죄가 용서받는데 말입니다.
이것은 병을 고쳐주는 기적과 죄를 용서해주는 기적이
별개가 아님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하지만 저는 신학교에서 “기적을 하지 않아도 거룩하지 않아서 그런 것은 아니다. 세례자 요한을 봐라.
그는 기적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지만 성인이다”라고 교육받았습니다.
맞는 말이기는 하지만 이것이 어쩌면 기적을 하지 않아도 나의 의로움과는 상관이 없다는 식으로 받아들여지게 된 것 같습니다.
사실 세례자 요한은 아직 성사 이전의 회개를 외치는 이이기에 그가 기적을 한다면 굳이 예수님께 갈 필요가 없어서 기적을 하면 안 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기적의 힘을 주시지 않은 것입니다.
교회는 전통적으로 ‘기적’을 ‘믿음의 증거’로 보았습니다. 누군가를 복자품에 오르게 하려면 공식적으로 인정받을만한 기적이 적어도 하나는 있어야 하고 성인이 되려면 두 개가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그 사람이 의인이었는지 알려주는 방식은 곧 ‘기적’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지니고 세상에 파견하실 때 악령을 쫓아내고 질병을 고쳐주는 능력까지 주시며 보내셨습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미사나 고해성사를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다면 그 이전에 병을 고치는 능력까지 주신 것입니다.
하지만 사제들은 그것을 잘 믿지 못합니다.
‘나 같은 죄인에게서 이런 기적이 나올 수는 없을 거야!’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아는 신부님도 당신에게서는 기적이 나올 수 없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신자들이 마귀가 심하게 들린 사람이 있다고 고쳐달라고 청했습니다.
신부님은 ‘난 안 되는데!’라며 어쩔 수 없이 그들에게 끌려가다시피 하였습니다.
구마경을 외우고 하니까 마귀가 신부님을 비웃었습니다.
마귀는 신부님의 죄를 모두 알고 있었습니다.
신부님은 기가 죽으면서도 ‘어찌 네가 감히 교회의 사제를?’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리고는 신자들을 그 마귀들린 사람 둘레로 빙 둘러앉게 하신 다음 묵주기도를 함께 바치자고 하였습니다.
처음에 비웃던 마귀는 점점 말이 없어지더니 식은땀을 흘리고 괴성을 질러대더니 결국은 그 사람에게서 도망쳤습니다.
예수님 당시 병과 죄는 하나였습니다.
그래서 병을 고치는 것이 죄를 용서하는 것이고 죄를 용서하는 것이 병을 고치는 것이었습니다.
요즘은 사제가 고해성사는 주면서 병을 고칠 수 있는 능력은 없다고 여깁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만약 이 믿음이 확고하였다면 아버지가 췌장암으로 길어야 3개월이라는 의사의 말을 들었을 때
몇 번이고 병자성사를 드리며 치유 기도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의사의 말을 더 믿고 치유 기도를 하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저 자신이 스스로 의인이 아님을 시인한 셈입니다.
정말 기적이 없다면 의인이 없는 것입니다.
사제도 그렇지만 신자들도 그렇습니다. 사제가 기적을 하지 못한다고 여겨 가만히 있으면 안 됩니다.
안수를 달라고 머리를 들이밀어야 하고 병자성사를 또 달라며 병이 낫지 않으면 한 달에 한 번은 또 병자성사를 달라고 청해야 합니다.
물론 병자성사를 남용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도 한 번에 안 되면 곧바로 또 하셨습니다.
벳사이다에서 사람들이 소경을 고쳐달라고 할 때 예수님은 먼저 그의 두 눈에 침을 바르시고 안수를 주신 다음 “무엇이 보이느냐?”(마르 8,23)라고 물으십니다. 그는 “사람들이 보입니다. 그런데 걸어 다니는 나무처럼 보입니다” (마르 8,24)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이번에는 그의 두 눈에 손을 얹으셨습니다.
그제야 “그는 시력이 회복되어 모든 것을 뚜렷이 보게”(마르 8,25) 되었습니다.
물론 이 치유는 상징적인 다른 의미도 있지만, 어쨌건 예수님께서 될 때까지 여러 번 노력하셨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그러니 신자들도 사제에게 될 때까지 병자성사를 청해야 합니다.
병자성사의 한 부분이 돌아가시기 직전의 ‘종부성사’가 되는 것이지 병자성사의 본래 의미는 아픈 이에게 기름을 발라 치유해주는 성사입니다.
제가 수원교구 영성관에 있지만, 작년 죽산성지도 잠깐 맡은 적이 있습니다.
그때 미사를 자주 나오시는 어떤 분이 병자성사를 신청하셨습니다.
솔직히 ‘아, 병자성사는 자신의 본당에서 하시지 왜 나에게?’라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병자성사를 부탁받으면 무조건 해 드려야 한다는 사제의식이 있기에 미사 후에 따로 병자성사를 해 드렸습니다.
갑상선 암을 수술하기 며칠 전이어서 병자성사를 드리는 중에 병이 나아 수술하지 않으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 일을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얼마 뒤 미사를 하고 있는데 한 분이 한없이 울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목에 스카프를 한 것을 보니 그분인 것이 확실했습니다.
‘수술하셨구나. 그런대 왜 저렇게 많이 울고 계시지? 잘 못 됐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미사가 끝나고 그분과 남편이 남아계셨는데, “신부님, 기적이에요”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니, 왜요?”라고 물으니 “조직검사까지 다 끝나서 암이 확실했는데, 의사가 열어보니 암이 아니라 염증이었다고 해요.
그래서 항암도 안 해도 된대요.
염증만 제거했습니다”라고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저도 ‘주님께서 해 주셨구나!’라고 생각하면서도 “자매님이 믿음이 강해서 은총 받으셨네요”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면서도 ‘아, 아버지가 아프셨을 때도 이렇게 할 수 있었다면!’이란 생각이 다시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만약에 본당에 가게 된다면 한 달에 한 번은 아프신 모든 분에게 병자성사를 주어야겠다’라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되었습니다.
기적이 없다면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다면 의인이 없는 것입니다.
사제도 그렇지만 신자도 그렇습니다.
사제가 그런 믿음이 없다면 신자들이 청해야 합니다. 사제를 귀찮게 해야합니다.
예전에 “남편은 아내 하기 나름이에요”라는 광고도 있지 않았습니까? 기적이 많아져야 고해성사도 많이 보고
성체성사도 많이 하게 될 것입니다.
인간은 보지 않으면 믿지 못하는 습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전엔 지금보다 더 많은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가톨릭교회에서 지금보다 훨씬 많은 기적이 일어나기를 기대해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