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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월 12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2-01-12 조회수 : 1090
1월12일 [연중 제1주간 수요일] 
 
마르코 1,29-39
 
본성을 변화시키는 사랑이란? 사랑의 봉사자가 되는 사랑뿐
 
오늘도 예수님은 밤낮없이 온종일 병자들을 치유하시고 악령을 쫓아내시고 복음을 선포하십니다.
이것이 세례를 받아 ‘사람 낚는 어부’가 된 이들이 따라야 하는 삶임을 알려주고 계신 것입니다. 
 
특별히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있는데 사람들이 그 부인의 사정을 이야기하자 예수님은 그 부인의 손을 잡아 일으키십니다. 
그랬더니 열이 그녀에게서 떠나갔고 부인은 ‘그들의 시중’을 듭니다. 
 
이 짧은 에피소드가 지금까지 예수님께서 해 오신 모든 복음선포의 사역을 한순간에 다 설명해줍니다.
당신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몸소 사람 낚는 어부가 되어 제자들을 당신 복음선포 사역에 초대하셨습니다.
왜 그들을 당신 사랑의 실천에 ‘초대’하셨을까요? 그들 나름대로 하느님을 섬기면 안 됐을까요? 
 
사람은 아무리 누군가를 사랑하려 해도 명확한 어떤 ‘부르심’에 따르지 않으면 저절로 ‘자기 자신을 위한 사랑’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사랑으로 우리 본성이 회복되는 것이 아니라 더 타락할 수도 있습니다. 
 
미무라는 36세의 건축 디자이너입니다.
마레히사 씨에게 상담하러 온 이유는 자신은 9개월밖에 안 된 신혼부부인데 아내가 갑자기 이혼하자는 편지만
한 통 남겨놓은 채 집을 나가버렸다는 것입니다. 
아내는 29세이고 이름은 아야였습니다.
아야가 워낙 이혼에 대해 굳은 결심을 하고 있어서 간신히 이혼을 전제로 3번만 함께 상담을 받아보기로 했습니다. 
 
남편은 일 때문에 매일 거의 새벽 1시에 들어왔습니다.
아내는 “결혼을 했는데도 줄곧 외롭기만 했어요”라고 말합니다. 
 
“나는 열심히 집안일을 하고, 남편이 집에 돌아올 때는 웃는 얼굴로 맞이하면서 그가 조금이라도 편안하게 쉴 수 있도록 신경을 쓰고 계속해서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남편은 지진이 났는데도 집에 바로 오지 않았어요.
남편은 배려가 없는 사람이에요. 이런 사람과는 함께 살 수 없어요.”
 
그녀가 이런 마음을 가지게 된 것은 남편이 3년 동안 사귀던 약혼녀인 직장 동료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약혼까지 하고 다른 남자와 결혼하였습니다. 그래서 남편은 그녀에게 배신감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아야는 남편이 늦게 들어오면 집에서 걱정만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도 그녀 밑에서 일한 경험이 있어서 그녀가 자신보다 훨씬 멋지다고 여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남편은 그녀에 관해 관심이 1%도 남아 있지 않았었습니다. 
 
이 둘이 합치면 잘 살까요? 당연히 이런 일이 반복될 것입니다. 아야는 ‘나를 위한 사랑’을 하는 것입니다.
남편도 잘하는 것은 없지만, 어쨌건 사랑을 내가 하려고 하면 상대에게 ‘보상’을 요구합니다.
‘내가 이만큼이나 노력했는데, 돌아오는 게 이거야 결국?’이라고 생각할 때가 옵니다.
 
이런 사랑은 사랑을 잃은 원죄의 본성을 회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가리옷 유다처럼 오히려 자신의 본성을 더 타락시킵니다. 
        [출처: 『오늘 알았던 걸 그때 알았더라면』, 이시이 마레히사, 밀라그로]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내가 사랑하는 대상이 아닌 제삼자 때문에 그 대상을 사랑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마더 데레사가 한 자살하려던 귀부인을 자신에게 오라고 해서 자신의 일을 돕게 만든 적이 있습니다.
그녀도 분명 사랑이 삶의 의미인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누군가 참사랑을 실천하는 이의 봉사자로 사랑한 것이 아니라 자기 주체적으로 사랑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사랑을 해도 우울하기만 한 것입니다.
 
사랑은 나의 본성을 회복시킵니다. 그러려면 자아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 때문에’가 아닌 ‘사랑이신 주님이나, 주님의 뜻을 따라 사랑을 실천하는 교회와 같은 이들 때문에’ 봉사하는 마음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시몬의 장모가 ‘그들에게 시중들었다’라고 할 때, ‘그들’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 곧 ‘교회’를 상징합니다.
그리고 ‘시중들다’라는 단어는 우리가 ‘식탁의 봉사자’라 불리는 ‘부제’(디아코노스)에서 나온 ‘디아코네오’입니다.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예수님은 물을 포도주로 만들어 식탁의 봉사자들에게 퍼서 나누어주라고 합니다.
이 사람들이 ‘부제’(디아코노스)들입니다. 
곧 사랑은 ‘포도주’입니다.
우리에게서 포도주의 본성이 나올 수 없습니다. 사랑은 곧 하느님의 본성입니다.
우리 사랑은 그 사랑의 흐름에 봉사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자아의 이기심에서 해방되어 나의 본성을 변화시키는 사랑을 하게 됩니다.
 
미국 동해안 메릴랜드에 병원을 개업한 ‘맥칼리스터 박사’는 아내와 함께 행복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아내가 세상을 떠나자 의사로서 손도 써보지 못하고 아내를 보내야 했던 심한 자책감과 우울증이 그를 점령했습니다. 
그는 중풍을 앓게 되었고 휠체어를 타며 먹고 입고 눕는 것조차 자기 손으로 할 수 없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삶의 의욕을 잃은 그는 자살할 생각만 했습니다.
세 명의 간호사가 항상 붙어있어야 했는데 그는 죽지도 못하게 하고 자신을 비참하게 하는 그 간호사들을 싫어했습니다. 
 
그는 해변가 높은 곳에서 바다를 보았으면 좋겠다고 간호사에게 말했습니다.
간호사들도 별생각 없이 그를 바닷가로 데려갔습니다. 맥칼리스터는 자기 걱정은 하지 말라고 하며 간호사들보고 수영을 즐기라고 하였습니다. 
간호사들이 수영을 즐길 때 자신은 벼랑으로 뛰어내릴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간호사 하나가 비명을 질렀습니다. 
그녀는 파도에 휩쓸려 바다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맥칼리스터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휠체어에서 일어나 바다로 뛰어들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은 맥칼리스터를 구조원이라 여겼습니다. 
맥칼리스터는 간호사를 이른 시간에 구해냈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중풍으로 인한 후유증과 우울증이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출처: 『어떻게 살 것인가』, 이충호, 하늘 아래] 
 
진정 우리 본성을 변화시키는 사랑은 사랑에 봉사하는 사랑입니다.
맥칼리스터가 중풍과 우울증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이유는 자기를 위한 사랑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순간적으로 ‘예수님이라면!’, 혹은 ‘의사라면!’이라고 생각했을 것이고, 그 어떤 참사랑 때문에 그것에 봉사하게 된 것입니다.
 
사랑을 따르는 것만이 순수한 사랑입니다. 
이렇게 병으로부터 회복되는 사랑은 이전에 자기를 위해 아내를 사랑한 그런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젠 죽기만을 원하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자기를 위한 사랑이 아니라 순수한 사랑의 방향을 따르게 된 것입니다.
 
이미 그리스도의 포도주가 그 여인에게로 행했고 맬칼리스터는 그저 그 포도주가 그녀에게 향하는 데 봉사한 것뿐입니다.
이런 사랑만이 우리 본성을 회복시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랑의 실천을 교회가 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사랑하는 데 우리도 참여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리스도 때문에 사랑합시다. 
그렇지 않으면 나의 사랑은 다 나의 본성을 더 타락시키는 이기적인 애착에 머물게 됩니다.
시몬의 장모처럼 그리스도와 교회에 시중드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사랑의, 사랑을 위한 봉사자들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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