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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월 9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2-01-09 조회수 : 1202
1월9일 [주님 세례 축일] 
 
이사야 42,1-4.6-7   사도행전 10,34-38  루카 3,15-16.21-22
 
세례의 큰 은혜: 감정이 상하는 두려움에서의 자유
 
오늘은 주님 세례 축일입니다. 
주님의 세례를 통해 세례의 은총을 묵상합니다.
루카 복음은 특별히 ‘기도’를 강조합니다. 
그래서 세례를 받고 성령께서 오시는 중간에 ‘기도’가 들어갑니다.
곧 “온 백성이 세례를 받은 뒤에 예수님께서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를 하시는데, 하늘이 열리며 성령께서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분 위에 내리시고….”라고 씁니다.
 
루카에게는 세례가 곧 성령을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보다는 세례로 ‘기도할 수 있어서’ 성령을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라는 생각이 더 컸던 것 같습니다.
 
어쨌든 ‘기도로 성령을 받을 능력’이 세례로 오는 것은 맞습니다. 성령을 받으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하느님의 자녀라는 믿음이 생깁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루카 3,22)
 
세례를 받으면 기도할 수 있고, 기도하면 성령을 받아 하느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을 갖게 된다는 것이 오늘 복음의 줄거리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이 우리에게 주는 이익이 무엇일까요? 바로 ‘좋은 기분’입니다.
정체성인 주는 것은 ‘기분’입니다. 
그리고 그 기분은 ‘감정’을 조절합니다.
사람은 감정으로 움직이는 동물이라 감정이 조절되지 않으면 그냥 동물처럼 됩니다. 
 
우선 감정은 이성으로 통제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예전에 중국 북부 산시성 산젠 마을에서 한 남자(34)가 자신을 버린 부인에 대한 복수로 결혼식장에서 폭탄을 터뜨려 36명이 사망하고 30여 명이 다친 일이 있었습니다. 
 
전직 석탄 광산 폭발물 전문가인 이 남자는 29일 아침 마차에 50kg짜리 폭탄을 싣고 마을 대로에서 열리는 결혼식장에 도착, 폭탄을 터뜨렸으며 자신도 목숨을 잃었습니다. 
범인은 지난해 부인 이 자신을 버리고 아들을 데려간 후
질투심과 분노에 가득 차 ‘최악의 사고’를 낼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다녔습니다.
그러나 사건의 원인인 범인의 부인과 세 자녀(아들과 두 딸)는 결혼식장에 없었습니다.
 
이 사람에게는 자신의 감정을 통제할 충분한 시간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감정은 억제되지 못했고 자신과 상관없는 수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치게 했습니다.
우리가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기 때문에 얼마나 많은 후회스러운 일들이 일어납니까?
감정만 조절할 수 있다면 우리는 훨씬 평화롭고 행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이 말하는 감정조절법은 ‘시간을 두고 다른 일에 집중하라’라는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감정은 저절로 사그라들고 또 다른 일에 집중하면 생각이 그것에서 벗어나 감정이 커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맞는 말이기도 합니다. 
 
‘참을 인’(忍) 자 세 개면 살인도 면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조선 시대 홍계관이라는 유명한 점쟁이가 어떤 젊은이의 점을 쳐 주었는데, 높은 벼슬을 할 팔자이지만
살인을 저지르는 점괘가 나왔습니다. 
젊은이는 살인을 면할 방법이 없겠느냐고 물었고, 홍계관은 집 안 구석구석에 ‘참을 인’자를 수없이 붙여놓으라고 했습니다. 
 
시간이 지나 젊은이는 높은 벼슬에 올랐습니다. 
며칠 지방에 갔다가 밤늦게 돌아왔을 때 방 불이 꺼져있고
댓돌에 못 보던 신발이 놓여있었습니다. 
 
“아니, 감히 외간 남자를 끌어들여?”
그는 분노에 눈이 뒤집혀 부엌에 가서 칼을 집어 들었습니다. 부엌 벽에 ‘참을 인’자가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분노를 가라앉힐 수는 없었습니다. 방으로 들어갔을 때도 ‘참을 인’자가 보였습니다.
역시 그를 멈추게 하지는 못했습니다. 
칼을 들어 내리찍으려고 하는데 천장에도 ‘참을 인’자가 보였습니다.
순간 그는 멈칫했고 그때 아내가 깨어 소리를 지르며 불을 켰습니다.
함께 누워있던 사람은 외간 남자가 아니었고 처제였습니다. 
 
이렇듯 시간을 두고 다른 것에 생각을 집중하면 감정의 폭발은 막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불을 켰을 때 진짜 외간 남자가 누워있었다면 어땠을까요? 더는 그의 분노를 막을 ‘참을 인’자는 없었을 것입니다.
시간을 끌고 다른 일에 집중하는 것만으로는 감정을 조절하는 데 한계가 있습니다.
 
외부적인 일이나 생각에서 생기는 것이 감정입니다. 감정은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감정은 대부분 ‘나의 생존’과 관련됩니다.
 
동물의 생존 본능을 담당하는 편도체는 이성을 담당하는 영역과 구별하여 작동하기 때문에 이런 감정이 즉각적인 행동을 만들어냅니다. 
우리가 이성으로 숨 쉬고 심장이 뛰게 할 수 없는 것처럼, 감정은 이성과 관계없이 나의 행동을 만드는 것입니다.
 
따라서 생존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우리는 언제나 감정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감정으로부터 진정으로 자유로워지는 길은 생존을 넘어선 사람이 되는 수밖에 없습니다. 
 
‘냇 킹 콜’(1917~1965)은 미국 영화 ‘모정’의 주제곡을 부른 것으로 잘 알려진 세계적 가수입니다.
그가 열여덟 살 나던 해 어느 봄날 오후, 그는 아버지와 함께 백인들이 사는 거리를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젊은 백인 청년이 다가와 아버지에게 길을 물었습니다. 그의 아버지가 길을 알려주려고 입을 여는 순간,
느닷없이 젊은 백인의 주먹질이 시작되었습니다. ‘미스터’라는 존칭을 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냇 킹 콜의 아버지는 코피를 흘리는 와중에도 일어나 정중하게 사과하였습니다. 
“아이 엠 소리, 미스터.”
이 광경을 보던 주위 백인들은 낄낄거리며 웃었습니다. 
 
눈이 뒤집힌 젊은 혈기의 냇 킹 콜은 불끈 주먹을 쥐고 백인에게 대들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아들의 팔을 붙들며 나직하면서도 엄격하게 타일렀습니다. 
“참아, 냇! 지금은 안 돼. 아직은 안 된다.”
 
집에 돌아온 그는 한구석에서 분을 삭이지 못해 통곡하며 그 밤을 지새웠습니다.
그리고 이튿날 편지를 남기고 집을 떠났습니다. 
 
“백인과 대등해지기 위해서는 우리 흑인이 백인 이상이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로부터 수년 후, 그는 ‘백인 이상’이 되었습니다.
미국에서 백인들도 인정하는 유명 가수가 되었던 것입니다. [출처: ‘어떻게 살 것인가’, 이충호, 하늘아래]
 
냇 킹 콜이 화가 난 이유는 ‘나는 흑인이다’라는 믿음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가 성공했을 때는 ‘그게 무슨 상관이야, 나는 스타인데!’로 바뀌었습니다. 
 
감정은 생각으로 제어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만 제어될 수 있습니다.
위 젊은 사람의 살인을 막아낸 것은 ‘참을 인’자 세 개였을까요? 아닙니다.
아내가 불을 켜서 사실을 확인시켜주었기 때문입니다.
아내에 대한 믿음이 회복되지 않으면 감정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차곡차곡 쌓였다가 언젠가 다시 폭발할 것입니다. 
 
우리가 헷갈리는 것 가운데 하나는 ‘기분과 감정을 혼동한다는 것’입니다.
기분은 믿음에서 오는 것이고 감정은 환경에서 오는 것입니다.
 
오늘 누군가가 나를 무시하는 발언을 했다면 나는 기분이 나쁠까요, 아니면 감정이 상한 걸까요? 감정이 상한 것입니다.
그런 것으로 기분까지 나빠질 수 없습니다. 
감정이 상했다면 원래 기분이 나빴던 것입니다.
기분은 환경에 좌우되지 않습니다. 
나의 정체성이 기분을 결정합니다.
그리고 그 정체성은 내가 누구라는 믿음에서 옵니다. 
 
세례는 나의 정체성에 대한 믿음을 바꿔 내가 하느님 자녀라는 믿음을 줍니다.
그리고 ‘나는 이런 상황에서 기분이 나빠질 필요가 없는 사람이다!’라는 믿음을 줍니다.
 
‘참을 인’자를 계속 보다 보면 ‘나는 화내는 사람이 아니다’라는 믿음이 생깁니다.
냇 킹 콜이 유명해졌다면 그는 흑인이라는 한계를 넘어선 것이기에 그로 인한 감정은 이전보다 훨씬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세례는 ‘하느님께 감사할 수 있는 특권’을 줍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또 기도로 언제든 하느님을 만나 성령을 받을 수 있습니다.
기분은 믿음에 의해 결정되는데 그 믿음을 주는 힘이 성령이십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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