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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월 8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2-01-08 조회수 : 994
1월8일 [주님 공현 대축일 후 토요일] 
 
요한 3,22-30
 
세례자 요한은 왜 예수님을 찾아가지 않았을까?
 
오늘 복음엔 ‘예수님의 세례’와 ‘요한의 세례’가 대비되어 나옵니다.
요한도 세례를 주고 예수님도 세례를 주시니 마치 경쟁자가 된 것처럼 나옵니다. 
그리하여 제자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스승님께서 증언하신 분, 바로 그분이 세례를 주시는데 사람들이 모두 그분께 가고 있습니다.”(요한 3,26)
요한은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 가장 큰 사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 나라에서 가장 작은 이도 세례자 요한보다는 크다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한 번은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것처럼 제자들을 보내어 그분이 메시아가 맞는지 확인하는 일을 합니다.
결정적으로 세례자 요한은 메시아가 오셨는데, 그 메시아를 만나러 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분들은 이제 세례자 요한에 대해 재평가가 내려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왠지 세례자 요한을 높이는 것은 현실적으로 맞지 않는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확신하건대 우리는 모두 아무리 거룩해져도 세례자 요한보다 높을 수 없습니다. 
 
세례자 요한과 같은 오해를 받는 분이 있다면 바로 ‘마더 데레사’입니다.
일부 개신교 신자들은 마더 데레사가 평생 하느님의 현존에 대한 확신을 느끼지 못하는 메마름 속에서 살았다는 사실을 들어, 믿음이 약해 구원을 받지 못했을 수도 있다고 말합니다.
믿음은 물론 그리스도와의 거리를 나타냅니다.
하지만 그 ‘소명’ 때문에 이 지상에서는 어쩔 수 없이 그분과 멀리 떨어져 살아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로마의 카이사르는 평생 로마에서 살아본 적이 별로 없습니다. 항상 로마의 국경을 더 넓히기 위해 변방에서만 살았습니다.
로마에서 떨어져 산 카이사르는 그러면 로마의 사랑을 받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물론 로마를 혼자 지배하려 들었기에 살해당하기는 하였지만, 로마 국민에게는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직무’상 멀리 떨어져야만 하는 역할이 있습니다. 달걀로 생각해보면 좋겠습니다.
달걀의 노른자가 예수님이라면 예수님과 더 가까운 것은 껍데기보다 흰자입니다.
껍데기는 노른자보다 본질에서 다르고 더럽고 딱딱합니다.
그러면 노른자는 자신과 더 가까운 흰자를 더 사랑하는 게 맞을까요,
아니면 더 변방에서 더 고통스러운 일을 하는 껍데기를 더 사랑하는 게 맞을까요?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몸통과 더 가깝다고 팔뚝을 더 사랑하고 손은 사랑하지 않을까요?
오히려 끝에서 고생하는 것들을 더 사랑하고 보살펴야 합니다.
물론 거리상으로는 멀지만 어쩌면 안의 것을 보살피기 위해 더 고생하는 것들은 바깥에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항구가 자신을 감싸고 있는 둑보다 맨 끝에서 배를 부르는 등대를 덜 사랑한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기도의 단계로 말하면 주님과 더 가까운 기도는 ‘관상기도-묵상기도-소리기도’ 순입니다.
저는 주로 묵상기도를 합니다. 관상수도원에 있는 수도자들은 주로 관상기도를 합니다.
그리고 마더 데레사는 거의 소리 기도를 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분 사진에는 항상 묵주를 들고 있고 수도자들과 공동으로 하려면 성무일도와 같은 소리기도가 주된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분은 저보다 묵상기도시간이 부족하다고 생각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와 더 가까운 기도를 하는 사람은 ‘관상가-저-마더 데레사’입니다.
 
이런 식이라면 마더 데레사는 성녀가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만약 계란의 노른자는 스스로 오염된 흰자를 더 고마워할까요, 아니면 자신을 지키려는 단단한 껍데기를 더 사랑할까요?
당연합니다. 자신과 멀어도 자신의 ‘뜻’을 더 충실히 따라준 껍데기를 더 사랑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 나라에서는 내가 어느 수준의 기도를 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나에게 맡겨진 소명에 어느 정도 충실했느냐?’로 결정됩니다. 
 
모든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세례의 중요성에 대해 말합니다. 특별히 요한복음은 더 그렇습니다.
소위 ‘로고스 찬가’(요한 1,1-18)에서 하느님과 사람이 되신 그리스도에 대해 말하며, 그분을 증언한 유일한 분으로 세례자 요한을 말합니다.
 
분명 세례자 요한은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의 길을 닦으라고 보내신 유일한 분이요, 구약으로 말하면 엘리야 예언자와 같은 분입니다. 
 
만약 기도의 단계로 본다면 세례자 요한은 기도를 시작하기 전의 ‘회개’ 단계에 있습니다.
그러니 타볼산에서 예수님의 신성을 보고 기적을 행했던 그분의 제자들이 세례자 요한보다 더 위대하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소명을 충실히 수행한 면에서는 세례자 요한에 사도들 못지 않습니다.
 
요한은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에 앞서 파견된 사람일 따름이다”(요한 3,28)라고 명확히 말합니다.
자신의 소명상 자신은 ‘회개의 세례’ 자리에 있어야지 그리스도께 가서 그분께 세례를 받으면 최초의 회개의 세례의 중요성을 선포하는 자의 역할이 약해집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은 제자들은 보내도 끝까지 그리스도께 가지 않은 것입니다.
그 거리의 중요성을 보여주어야 하는 소명 때문입니다. 
 
삶의 기쁨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의 수준이 높아질수록 당연히 그 기도를 통해 받는 기쁨도 높아집니다.
그래서 기쁘지 않으면 기도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런 면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영광을 직접 볼 수 있는 것보다는 큰 기쁨이 없습니다.
다만 그분의 목소리를 다른 이들을 통해서 듣는 기쁨뿐입니다.
 
그러나 요한도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마음에 그분이 커지시는 소식만 들어도 그 기쁨은 매우 충만합니다. 
“신부를 차지하는 이는 신랑이다. 신랑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내 기쁨도 그렇게 충만하다.”(요한 3,29)
 
기쁨의 충만함은 소명의 충실에서 옵니다. 그만큼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달걀부침 하나 뒤집는 것, 하다못해 지푸라기 하나를 줍는 것도 하느님께 대한 사랑으로 했다는
『하느님의 현존 연습』의 ‘로렌스 수사’(1605-1691)나 빗자루 수사로 불리는 ‘마르티노 수사’(1579-1639)는 그리스도의 변두리에서 마냥 기뻤습니다. 
그만큼 완전하게 그리스도를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피부가 검은 노예 취급되는 혼혈이었던 마르티노 수사는 수도원에 들어가서도
“나는 불쌍한 노예일 뿐입니다”라고 말하고, 수도회 재정이 나빠지자
“나는 수도원의 재산이니 나를 노예로 팔아 빚을 갚으십시오”라고 청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분들이 주방에서 평생 일만 하였고 마당을 쓰는 일만 하였다고 해서 누가 관상 수도회의 수도자들보다
영성이 낮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분들은 사랑의 현존 안에서 그 사랑이 자기 자신에게 요구하는 구체적인 사랑실천을 했기에 온전히 모든 시간의 삶이 기도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행복했습니다. 
 
기도는 그분의 뜻에 내 마음을 일치시키는 것입니다. 나의 춤을 그분의 음악에 맞추는 것입니다.
이럴 때 기도의 맛을 느낍니다. 기도의 맛(기쁨)과 기도의 필요성(소명)만 잊지 않는다면 참 행복이 무엇인지 알게 되어 기도하지 않고서는 살 수 없는 사람이 됩니다.
 
아테네에 있는 사람들이 누군가를 부활시킬 힘이 있다면 자신들을 위해 젊은 나이에 싸우다 요절한
알렉산더 대왕을 살려내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는 기도를, 그것이 어떤 기도이건 간에, 당신 뜻에 일치하려는 강한 열망으로 했다면,
그 사람을 부활시켜 가장 당신과 가까운 자리에 앉히실 것입니다.
그 사람의 ‘뜻 안에’ 머무는 것이 그 ‘사람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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