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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월 6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2-01-06 조회수 : 1341
1월6일 [주님 공현 대축일 후 목요일] 
 
루카 4,14-22ㄱ
 
말씀을 받아들일 귀를 뚫는다는 의미는?
 
예수님은 광야에서 유혹을 물리치시고 “성령의 힘을 지니고”(루카 4,14) 갈릴래아로 돌아오셨습니다.
그리고 회당에서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루카 4,18)라고 시작하는 메시아에 관련된 말씀을 읽으시고 이 말씀이 지금 이 자리에서 실현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말씀’이십니다. 
그런데 그 말씀은 성령과 결합하여야 힘을 발휘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4,21)라고 하십니다.
직역하면, “오늘 이 말씀이 너희 귀에 가득찼다”가 됩니다.
복음이 성령과 합쳐질 때 비로소 듣는 사람 귀에 가득 차게 된다는 뜻입니다. 
 
성령은 광야에서 삼구의 유혹을 물리쳐 죄가 없는 사람에게 가득합니다.
성모님만큼 성령으로 가득하신 분이 없으셔서 성모님의 한 말씀이 엘리사벳을 성령으로 가득 차게 만든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소리만 지르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성령이 내 안에 오시면 나는 피를 흘릴 수밖에 없고 그 피가 섞인 말씀만이 누군가의 귀를 가득 채울 수 있는 것입니다.
귀에 가득 차지 않는 말씀은 들리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소림사 18동인’(1976)이란 오래된 영화가 있는데, 여기에서 모든 어려운 과정을 다 마치고 마지막 하는 것이 있는데 불붙은 화로를 가슴에 안아서 그 화로에 쓰인 글자와 그림이 몸에 새겨지게 하는 과정입니다.
이처럼 말씀만으로는 안 되고 불이 있어야 합니다. 화로가 말씀이라면 불이 성령이십니다.
이 성령으로 불타는 화로를 옮기는 이는 그 말씀이 자신 안에 새겨집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복음’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불을 통해 나에게 말씀이 새겨질 때 이것이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언제나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십시오! 꼭 필요하다면 말도 하십시오.”
 
그런데 오늘 복음 바로 뒤에서 그 성령으로 충만한 말씀을 들은 이들의 반응은 처음엔 이랬습니다. 
“그러자 모두 그분을 좋게 말하며,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은총의 말씀에 놀라워하였다.”(루카 4,22)
 
하지만 곧이어서 그들은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루카 4,22)라고 말하고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루카 4,24)라는 말씀에 잔뜩 화가 나서 예수님을 벼랑 끝까지 끌고 가 떨어뜨리려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 한가운데를 뚫고 지나가십니다.
말씀이 그들 안에 머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 묵상을 할 때 말씀의 뜻을 깨달으려 노력합니다.
그러나 말씀이 아무리 내 귀에 가득히 차도 귀가 뚫리지 않으면 그 말씀이 내 속으로 들어가지 않습니다.
귀가 뚫린다는 말은 그분의 ‘종이 되려는 마음’을 의미합니다.
종이 풀려날 수 있지만, 주인의 종으로 평생 남고 싶다면 주인이 그 종의 귀를 뚫었습니다(탈출 21,1-6 참조).
그리스도의 종이 되려는 마음이 없다면 귀가 뚫린 것이 아니고 아무리 말씀이 충만하게 주어져도 그 말씀의 참 의미를 깨달을 수 없게 됩니다. 
이것이 아무리 묵상을 하려 해도 그 말씀의 뜻이 잘 다가오지 않는 이유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당신의 피와 함께 오는데 우리는 피 흘리려 하지 않는다면 그 말씀은 나에게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합니다. 
 
넷플릭스 드라마 ‘무브 투 헤븐’은 배다른 형과 동생의 긴 화해의 여정을 보여줍니다.
이혼한 어머니와 형은 잘 살고 있었지만, 이복동생은 아버지에게 폭력을 당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죽자 형은 이복동생을 고아원에 가지 않게 하려고 빼내 오려 합니다.
 
하지만 동생이 좋아하는 나이키 신발을 사러 갔다가 삼풍백화점 붕괴가 있어서 며칠 동안 갇혀 동생을 만나지 못합니다.
동생은 형을 화장실도 가지 않고 약속장소인 시골 역에서 사흘이나 기다리다가 결국엔 싸움꾼으로 성장하여 감옥까지 가게 됩니다. 
 
동생이 출소하던 그 날 형은 자기 아들을 돌봐달라는 조건으로 자신의 집을 자신에게 맡겼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형과 형수는 암으로 죽은 상태였습니다. 
지금까지 그렇게 찾아오지 않던 형이 미웠지만, 재산이 탐나서 조카가 사는 곳으로 들어갑니다.
 
조카는 지적 장애인이었습니다. 
하지만 죽은 아버지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약속을 지키지 못한 괴로움에 매년 삼풍백화점이 무너진 날만 되면 그 역을 방문했었고, 동생과 함께 타고 싶었던 놀이기구를 아들을 태워주면 동생을 그리워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삼풍 백화점에서 자신에게 주려고 꼭 껴안고 있었던 나이키 신발까지. 이 모든 것을 보며 그는 형의 사랑한다는 말을 받아들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사랑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은 지금까지 내가 가지고 있던 모든 생각을 포기하고 그분 앞에 무릎 꿇으려는 마음을 가지기 전까지는 들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나를 통해 당신의 말씀이 또 다른 이들에게 흘러가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분 말씀으로 죽지 않으려는 사람은 그래서 아무리 묵상을 해도 ‘자기 생각 정리’밖에는 안 되는 것입니다.
자기 생각을 정리하는 것은 묵상이 아닙니다. 
묵상은 그분의 말씀이 나에게 새겨져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태어나게 만드는 과정입니다. 
그 깨달음은 아주 짧고 강렬하고 기쁨을 줍니다.
그리고 나를 말씀의 종이 되게 만듭니다.
 
주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기 전에 우리는 먼저 우리 귀가 그분의 말씀에 뚫려있는지 먼저 살펴야 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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