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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월 5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2-01-05 조회수 : 1113

신앙생활을 해도 사자가 아니라 하이에나가 되는 이유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어오셔서 제자들의 어려움을 해결해주는 내용입니다.

제자들은 맞바람이 불어 노를 저어 호수를 건너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산에서 기도하시던 예수님은 물 위를 걸어 제자들에게 오십니다. 제자들은 유령인 줄 알고 비명을 지릅니다.

이때 예수님은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라고 그들에게 믿음을 북돋아 주십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배에 오르자 바람이 멎었습니다. 어려움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이 당신을 알아보지 못하면 그냥 그들 곁을 지나가려고 하셨습니다.

만약 제자들이 예수님을 자신의 배에 태우지 않고 어려움만 극복하게 해달라고 청했다면 어땠을까요?

바람을 멎게 해주실 수 있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배에 물에 샌다던가, 동료들끼리 서로 다투게 되는 등의 또 다른 어려움에 직면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모든 어려움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것은 그분의 도움이 아닌 그분 자신입니다. 

 

어떤 분은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는데 말년에 당신과 친했던 사람들을 주님은 다 데려가시고 당신만 외롭게 남은 것에 하느님이 원망스럽기까지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그저 기도만 드리고 있다고 했습니다. 

 

기도의 목적이 무엇일까요? 그분은 마치 자신을 외롭지 않게 만들기 위해 사람들을 다시 살려내거나 아니면 자신을 사랑해주는 사람들이 생기게 해 달라고 청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기도는 왠지 ‘지금은 섭섭하지만 나를 외롭지 않게 해주신다면 사랑할게요!’ 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먼저 그분을 사랑해야 그분이 도와주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배에 타시자 바람이 멎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바람을 멎게 하시고 배에 타신 것이 아닙니다.

먼저 우리가 그분께 감사하여 그분을 우리 배 안에 맞아들일 수 있을 때 우리 모든 어려움이 사라집니다. 

 

어떤 사람이 있었습니다.

결혼도 하고 자녀도 낳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행복하지도 기쁘지도 않았습니다.

결국, 그는 집을 떠나 몇 년 동안 여기저기 돌아다녔습니다.

그러다가 어떤 사람을 만났는데 그가 이러저러한 산에 가면 그 꼭대기에 현자가 살고 있다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분명 그 현자가 인생의 의미를 발견할 방법을 알려줄 것이오.”

 

우여곡절 끝에 그 사람은 산꼭대기에서 현자를 만나 자신의 어려움을 털어놓았습니다.

그 현자는 그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어떤 숲에 하니에나 한 마리가 살고 있었소. 하지만 그 하이에나는 다리를 심하게 다친 것 같았소.

그런데 하이에나의 특징이 뭔지 압니까? 하이에나는 먹잇감을 발견하면, 떼로 공격한다는 거요.

그러다가 그 가운데 한 마리에게 어떤 일이 생기면, 다른 하이에나들은 그를 놔두고 떠납니다.

 

그들은 서로를 돌보지 않고, 단지 공격할 때만 함께하지요.

그것이 일반적인 동물의 생리지요.

그래서 그 다친 하이에나가 죽을 지경이 되었는데, 그 순간 사자 한 마리가 나타났소.

사자는 죽어가는 하이에나를 보고 불쌍한 마음이 들었지요.

그래서 하이에나를 자기 굴로 데리고 가서 정성껏 보살폈소.

그리고 하이에나는 다시 건강을 회복해 아주 편안해졌습니다.”

 

현자가 이야기를 이어가려고 하는데, 그 사람은 현자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지 이미 안다고 생각해

이야기를 중단시켰습니다.

‘그래, 집에 가야겠다. 가서 사자 앞의 하이에나처럼 겸손하게 가족과 함께 살다 보면 다시 행복해질 수 있을 거야.’

 

그는 현자의 이야기를 더 듣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산에서 내려왔습니다.

그가 집으로 돌아오자 가족들은 기쁘게 그를 맞아들였습니다.

정말 그는 행복해졌습니다.

가족들은 겸손해져서 돌아온 그를 위해 성대한 잔치를 열어 귀향을 축하해주었습니다.

그가 사랑을 얻고 가족의 돌봄으로 편안하게 되자, 마침내 인생의 의미를 발견한 듯했습니다. 

 

‘현자의 말이 옳았어. 그동안 나는 인생을 헛살았던 거야. 가족과 함께 사랑하고 사랑받는 삶은 얼마나 행복한지.’

그러나 몇 달이 지나지 않아 가족들은 각자 삶에 바빠 그에게 관심을 덜 쏟게 되었고 심지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뒹굴뒹굴하는 그를 지겨워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또 외로워졌고 인생의 의미를 잃었습니다.

그는 생각했습니다. 

 

‘그 현자가 틀렸는지 몰라. 다시 찾아가 봐야겠어.’

그는 현자가 있는 산꼭대기로 올라가 그동안의 일을 이야기했습니다. 

 

“저는 현자께서 말씀하신 대로 호랑이 곁의 하이에나처럼 겸손하고 감사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행복했지만, 이제는 행복하지 않습니다.

현자님의 말씀에 무언가 부족한 것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자 현자가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습니다. 

 

“당신은 나를 존중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도움만 받으려 했습니다.

그러니 온전한 도움을 받지 못한 것입니다.

도움을 받으려면 먼저 도움을 주는 사람을 사랑해야 합니다. 당신이 나를 사랑하지 못해서 듣지 못한 말이 있습니다.

내가 당신에게 하고 싶었던 말은, 집에 가서 하이에나처럼 살지 말고 사자처럼 살라는 것이었습니다.”

[출처: ‘치유의 순간’, 안토니오 사지, 바오로딸]

 

예수님께 도움만 청하는 사람은 그분의 도움을 어설프게 받습니다. 

그래서 결국 고통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우리를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은 기분의 도움이 아니라 그분 자체이십니다.

그분의 도움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이에나처럼 비굴하게 사는 것이 아닌 사자처럼 사랑을 베푸는 사람이 되어 정말 삶의 의미를 찾게 됩니다.

그분의 도움을 청하는 불완전한 신앙에서 그분 자신을 사랑하는 참 신앙으로 나아갑시다. 

 

구엔 반 투안 추기경은 주교가 된 지 몇 년 후에, 베트남 공산정권에 의해 투옥되어 13년 9개월 동안

독방에 갇혀 지냈습니다.

처음에는 신자들을 위해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이 그를 몹시 힘들게 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그에게 오셔서 물으셨습니다. 

 

“투안, 너는 나를 선택했느냐? 내 일을 선택했느냐?”

투안은 대답했습니다. “예수님, 저는 당신을 선택했습니다.”

그때 비로소 그는 모든 고통과 슬픔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우리는 배에 예수님은 태우려 하지 않으면서 예수님의 도움을 청할 때가 있습니다.

왜 나에게 이런 어려움을 겪게 하느냐며 하느님을 원망하면서 동시에 하느님의 도우심을 청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먼저 하느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이런 일을 겪게 한 것은 이유가 있고 그 이유가 그분을 더욱 사랑하게 만드시려는 것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키워가는 것이 중요하지, 그분이 도움을 주시면 사랑하겠다는 식이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여 내 안에 모시는 것만이 모든 어려움에서 해방되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리스도를 내 안에 모셨다면 우리는 하이에나의 삶에서 사자의 삶으로 바뀝니다.

진정 또 다른 그리스도가 되는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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