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은 어떤 사람을 관상기도의 은총으로 부르시는가?
오늘 복음에서 아기 예수님은 성전에 봉헌되시고 이때 시메온이라는 사람이 아기 예수님을 알아보고 기쁨에 넘칩니다.
그 많은 사람 가운데 시메온이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었던 이유는 ‘성령’께서 그 사람 위에 머물러 계셨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는 그가 주님을 뵙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려주셨고 결국, 성령께서 그를 이끌어 메시아를 만나게 하신 것입니다.
기도의 단계에서 가장 높은 ‘관상’의 단계에 도달한 것입니다.
기도의 단계는 크게 세 단계로 나뉘는데 ‘소리기도-묵상기도-관상기도’입니다.
이 중에서 관상기도는 소리기도와 묵상기도를 제대로 할 줄 아는 사람이 마지막에 다다를 수 있는 가장 완전한 기도입니다.
관상기도에서는 소리기도에서 육체적으로 우리와 함께 계신다고 믿어지고 묵상기도에서 정신적으로도 함께 계신다고 믿어지던 그리스도를 실제로 만나서 마음의 큰 변화를 체험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이 은총이 기도하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지는 않고 오늘 시메온처럼 성령의 도움으로 인생에서
오직 그분을 만나는 것만이 의미가 있고 또 그분께서 반드시 만나주신다는 믿음을 성장시킨 사람에게만 주어집니다.
‘포스베리의 역발상’이란 소리를 들어보셨습니까? 현재 육상 높이뛰기 선수들은 모두 배가 하늘로 향한 채 뒤로
바를 넘습니다.
이른바 ‘배면뛰기’ 자세입니다.
하지만 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에서 미국의 한 선수가 이 자세를 처음 선보이기 전까지는 아무도 생각지도 못했던 자세였습니다.
그전까지는 다들 바를 앞 또는 옆으로 장대를 넘었습니다.
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에서 당시 21살의 미국 선수 딕 포스베리가 배면뛰기를 처음 시도했고, 올림픽 신기록을 세우며 우승을 차지해 전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그의 이름을 따서 배면뛰기는 현재 ‘포스베리 플롭(fosbury flop)’이라는 공식명칭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포스베리 플롭은 지금도 스포츠사에서 역발상의 백미로 꼽히고 있고, 스포츠계의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으로 불릴 정도입니다.
포스베리는 높이 뛰기 선수였지만 배면뛰기를 하기 전까지는 올림픽 출전 가능성이 희박한 실력이었습니다.
선수 생활을 계속해야 하나 말아야 하는 절박한 상황에서도 그는 분명히 이 한계를 극복할 방법이 있을 것이라 여깁니다.
그러다 뜀틀 공중제비돌기를 하는 선수들의 모습을 보고 영감을 받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시도해보지 않은 뒤로 뛰기를 연습합니다.
어느 각도에서 어떻게 뛰어야 가장 좋은지의 수 없는 과정을 통해 기록이 향상되었고 올림픽 대표로 발탁되었으며 멕시코시티 올림픽에서 올림픽 신기록을 세우며 금메달을 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사례는 현재 수영 자유형과 배영에서 발로 턴을 하는 동작인 ‘플립 턴’의 발견에서도 이어집니다.
아돌프 키예프 선수는 100야드(91.44m) 배영 경기에서 누구도 불가능하다는 마의 1분 벽을 깨고 싶었습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결과 물속에서 회전하여 발로 터치를 하는 방법을 발견하게 되었고 1935년 배영 100야드 경기에서 59.8초로 마의 1분 벽을 돌파합니다.
그리고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배형 100m에서 기록한 1분 05초 9는 이후 20년 동안 깨지지 않았습니다.
바라고 믿으면 분명히 만나게 되는 게 있습니다.
이것이 기도에도 똑같이 적용되는 것입니다.
자신을 넘어서기 위해 극단적으로 자신을 몰아붙이면 반드시 만나는 해답이 있는데, 그리스도도 그렇게 만나게 됩니다.
희망과 믿음이 있다면 그 양 날개로 사랑이 있는 곳까지 오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 단 하나만을 바라는 완전한 ‘희망’과 또 그렇게 희망하는 이에게 반드시 그분은 만나주신다는 ‘믿음’은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시메온에게 그런 희망과 믿음을 ‘성령’께서 주셨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성령께서는 왜 누구에게 그런 희망을 주고 누구에게는 주지 않으시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어떤 이는 진정으로 ‘원하고’ 어떤 이는 원하는 척만 하기 때문입니다.
진정 그리스도를 만나기를 원해야 성령께서 이끌어주십니다.
목동들이나 동방박사들도 메시아의 탄생을 그렇게 원했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천사와 별로 그들을
그리스도와의 만남으로 이끄신 것입니다.
관상기도를 아주 잘 표현한 영화가 있는데 이란의 마지드 마지디 감독의 ‘천국의 빛깔’(The color of Paradise)입니다.
아름다운 이란 북부의 자연이 특히 돋보였던 이 영화의 주인공 소년 무하마드는 시각장애인입니다.
그에게 손가락의 감각으로 세상 사물들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말해주는 아저씨에게 그는 눈물을 흘리며 그가 원하는 것은 그것이 아니라고 이렇게 말합니다.
“아저씨도 알잖아요.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아요. 내가 시각장애인이기에 모두 내게서 도망가요. 볼 수만 있다면….
나도 다른 아이들처럼 일반 학교에 다니고 싶어요. 그렇지만 나는 맹인학교에 다녀야 해요.
내가 원하는 세상과는 완전히 다른 곳이에요.
우리 선생님은 우리가 볼 수 없기에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대요.
근데 왜 우리를 사랑하시는데 우리를 소경으로 태어나게 해서 당신을 보지 못하게 했을까요?
선생님은 말했어요. 하느님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그는 모든 곳에 존재하시고 저는 그분을 느낄 수 있대요.
저의 손가락의 감각을 통해서요.
그래서 저는 손을 여기저기 뻗는 거예요.
하느님을 만질 수 있을 때까지요.
그리고 그분에게 나의 마음속 비밀까지도 다 털어놓을 수 있도록요.”
아이가 원하는 것은 손의 감촉으로 나무의 질감을 느껴서 그것들을 생존을 위한 일거리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삶의 의미를 찾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는 분명 손을 뻗다 보면 주님을 만질 수 있을 것을 믿습니다.
어느 날 그는 새의 지저귐을 듣습니다.
직감적으로 새끼 새가 둥지에서 떨어졌음을 알아차립니다.
그리고 더듬더듬 나뭇잎들을 손으로 뒤집니다.
자칫 새끼가 다칠 수 있으니 아주 천천히 손을 움직입니다.
고양이가 다가옵니다.
그는 새끼 새를 고양이에게 빼앗길 수 없어서 솔방울을 들어 고양이 울음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던집니다.
이것은 하느님과의 계약을 위해 제물을 준비하고 그것들을 노리는 새들을 쫓는 아브라함의 모습과 닮았습니다.
그렇게 작은 새 한 마리를 발견합니다.
무하마드는 새끼 새를 자신 윗도리 앞주머니에 조심스럽게 넣고 새소리가 나는 나무를 찾습니다.
그리고 그 나무로 기어오릅니다.
눈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매우 힘겹게 기어오릅니다.
그리고 둥지를 찾아 새끼 새를 넣어줍니다.
그리고 고마워하는 새들의 소리를 듣습니다.
무하마드는 미소를 짓습니다. ‘사랑’을 만난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입니다.
우리도 사랑을 만나기를 원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그분만을 만나려는 바램과 그분을 반드시 만날 수 있기에 나의 더듬거리는 손짓을 포기할 수 없게 만드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이 믿음과 희망만이 결국엔 우리를 한 완전한 실체인 사랑이신 그리스도와의 만남으로 이끕니다.
관상에서의 그분과 만남은 한 인간이나 혹은 생각이나 관념이 아닌 한 온전한 사랑의 실체와의 만남입니다.
마더 데레사 성녀가 “목마르다!”라는 예수님의 목소리를 듣고 목마른 모든 가난한 사람들이 예수님으로 보이게 된 것과 같습니다.
또한, 김하종 신부가 한 냄새나는 가난한 아저씨를 안았을 때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라는 소리를 들은 것과 같습니다.
나의 존재가 완전히 그리스도로 변하여 모든 사람 안에서도 그리스도의 모습을 바라보게 됩니다.
돼지 눈에는 돼지가 보이고 부처 눈에는 부처가 보입니다.
이런 시각의 변화로 세상 어떤 피조물도 함부로 대할 수 없고 사랑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시메온처럼 우리도 그분을 만나기만을 원하고 그분의 자비만을 원하며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면 우리도 분명 죽기 전에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습니다.
묵상기도를 통해 무엇보다 이 희망과 믿음을 증가시켜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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