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나쁜 것이 생각하는 것임을 모르면 벌어지는 일
오늘은 성 요한 사도 복음 사가 축일입니다. 성 요한 사도는 사도 중 가장 완전한 성덕에 오르신 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요한 사도의 ‘겸손함’이 엿보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에 베드로와 함께 달려 무덤에 도착했지만, 교회의 수장인 베드로에게 먼저 무덤을 살필 권한을 양보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음을 믿을 수 없는 상황에서도 예수님께서 정하신 질서를 존중하는 것입니다.
형제간의 질서를 존중하는 힘은 이미 돌아가셨어도 형제를 낳아준 부모에 대한 존중에서 나옵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셨어도 요한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배반한 베드로를 여전히 자신보다 높은 교회의 수장으로 인정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힘은 분명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에서 나옵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없다면 절대로 벗어날 수 없는 것이 ‘자기 생각’입니다.
요한에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예수님을 배반한 베드로보다, 그리고 베드로보다 일찍 도착한 내가 먼저 무덤에 들어가 봐도 되는 거 아닌가?’라고 생각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이 생각을 끊게 해준 것이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 의지’인 것입니다.
모든 감정은 생각을 믿는 데서 생깁니다. 내가 누구에게 믿음을 주느냐가 나의 감정을 좌우합니다.
자아는 세.육.마.의 욕구를 자아내고 안 좋은 감정이 생기게 합니다. 이는 자동으로 일어납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면 자아를 믿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가 그리스도를 믿고 사랑하면 그리스도를 따릅니다.
그리스도는 이웃을 믿고 사랑하라고 합니다.
그러면 자아가 생각으로 만들어내는 감정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MBC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는 천재 수학자 쿠르트 괴델의 죽음과 관련된 사연이 공개됐습니다.
1906년 태어난 괴델은 타임지 선정 20세기 가장 위대한 인물 중 한 명이자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가장 위대한 논리학자로 불릴 만큼 천재였습니다.
특히 그가 고작 24살에 발표한 ‘불완전성 정리’는 지금까지도 여러 학문에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불완전성의 원리란 ‘증명할 수 없는 수학적 명제들이 있다’라는 지금까지 수학으로 증명할 수 없는 명제는
없다는 이론을 뒤집는 엄청난 업적이었습니다.
하지만 괴델의 삶 역시 불완전했습니다.
그는 급여가 조금만 늦어져도 자신이 면직당한 게 아닐까 노심초사했고, 건강 문제로 불안에 떠는 등
매사 심각한 불안증에 시달렸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괴델은 8살 때부터 류머티즘에 시달리느라 소극적이고 자신감 없는 아이로 자라났습니다.
또 성인이 되고 업적을 세운 뒤에도 10년 가까이 대학 강사로만 지내야 했고,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39년에는 그마저도 박탈당하고 말았습니다.
이런 일들을 겪으며 자기혐오에 시달리던 그는 급기야 심각한 불안 증세를 보이게 됐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괴델을 가장 믿어준 건 천재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27년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 세기의 우정을 쌓았습니다.
괴델이 미국으로 건너와 시민권을 취득하는데 아인슈타인이 증인으로 참석하였고, “괴델과 함께 집으로 돌아오는 특권을 누리기 위해 연구소에 간다”는 편지를 쓰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1955년 아인슈타인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면서 괴델의 불안 증세는 더 커졌습니다.
그는 아인슈타인의 죽음에 음모가 있을 거라 망상했고, 자신도 죽임을 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시달렸습니다.
심지어 누군가 독을 탔을 거라는 생각에 다른 사람이 주는 음식은 절대 먹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괴델은 사랑하는 아내 아델이 만든 음식만큼은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사망한 이유 역시 아델이 병원에 입원했기 때문입니다.
오랜 지병을 앓던 아델은 수술을 앞두고 주변 사람들에게 괴델을 간곡히 부탁한 뒤 병원으로 떠났습니다.
하지만 아내가 해준 음식만 먹던 괴델은 정말 아무것도 먹지 않았고, 심지어 강제 입원한 병원에서도 끝내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결국, 괴델은 영양실조로 아사했습니다.
사망 당시 그의 키는 168cm, 몸무게는 29kg이었습니다.
괴델의 망상은 어디서 온 것일까요? ‘생각’에서 온 것입니다. 생각을 믿은 것입니다.
생각을 믿었다는 말은 자기 자신을 믿었다는 말입니다. 자기 자신을 믿는다는 게 이렇게 무섭습니다.
모든 생각은 ‘자아’가 자신을 믿어달라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자신에게 관심을 보여달라고 이것저것 시킵니다.
이것이 자아의 뜻입니다.
괴델에게는 이것이 타인을 믿지 말라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자아의 뜻은 세속-육신-마귀의 생존 욕구를 실현하는 것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욕구는 뜻입니다.
그러고는 “나 없으면 어쩔 뻔했냐?”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자아가 하고 싶은 마지막 말입니다.
자아로부터 탈출하는 유일한 길은 나를 믿지 않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다른 이를 믿고 그러기 위해 예수님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세.육.마.의 반대 욕구인 ‘사랑’을 욕구로 제시합니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남을 살리는 삶을 살도록 이끄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내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겠다는 의지만 확고하면 더는 자아가 생각으로 나를 괴롭히지 못합니다.
요한에게 “네가 먼저 들어가 봐도 돼!”라고 말할 때, “난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건데?”라고 말하면
자아는 더는 나에게 말을 할 수 없게 됩니다.
생각의 목적이 욕구이기 때문에 이미 욕구가 확고하게 정해져 있다면 더는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명상과 같은 방법으로 억지로 생각을 끊는 것보다 더 완전히 자기 생각을 끊는 방법은 그래서
‘사랑하고자 하는 확고한 의지’입니다.
이 의지만이 우리를 자아의 압제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먼저 믿고 사랑하려고 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부모를 사랑하지 않으면 형제도 사랑스럽게 보이지 않는 것처럼, 우리는 우리를 창조하신 주님을 먼저 사랑해야 이웃도 믿고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제임스 딘이 사망한 이유는 피어 안젤리라는 여인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안젤리도 제임스 딘을 사랑하였고 제임스 딘의 청혼을 받아주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반대로 안젤리는 빅 데이몬이란 가수와 결혼하게 됩니다.
하지만 제임스 딘도 힘들어하고 안젤리도 힘들어하여 빅 데이몬은 직접 촬영장에 있는 제임스를 찾아갔고
그에게 더는 안젤리를 힘들게 하지 말라고 말하였습니다.
그 말을 한 20분 뒤 제임스는 고속도로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하였습니다.
그리고 제임스 딘의 죽음에 대한 자책과 그리움으로 안젤리도 데이몬과 이혼하고 몇 년 뒤 마약 중독자가 되어 제임스를 따라갑니다.
제임스 딘은 말합니다.
“빨리 살고 일찍 죽는다. 그래서 가장 아름다운 사랑을 남긴다.”
피어 안젤리는 말합니다.
“내 사랑은 이미 (포르쉐에서) 죽었다.
그래서 난 죽음이 두렵지 않다.”
아름다운 사랑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을 믿고 사랑하는 것에서 자기 자신을 벗어나려 한 한계를 말해줄 뿐입니다.
만약 인간을 사랑해서 자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면 예수님이 오실 필요가 없으셨을 것입니다.
인간의 사랑은 자아의 책략이 숨어있기 때문에 항상 불완전하고 그래서 그런 인간을 사랑하는 것으로는
자아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없습니다.
우리에겐 우리를 순수하게 사랑해주시는 창조자 하느님의 사랑이 필요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했다면 제임스 딘은 빅 데이몬도 사랑하려고 노력했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의 삶은 바뀌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으면 그리스도는 “사랑하라”는 말만 하십니다. 이것이 그분을 향한 생각의 결론입니다.
물론 이 결론에 이르게 하도록 생각도 하게 하십니다. 이것이 묵상기도입니다.
묵상기도는 그리스도께 더욱 완전한 신뢰를 두게 만들어 사랑하려는 욕구를 북돋웁니다.
그러면 마치 사랑이라는 기차에 몸을 담은 사람처럼 생존 욕구를 강요하는 자아에서 탈출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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