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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2월 25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1-12-25 조회수 : 1092

평화의 길: “허기진 이 세상에 따듯한 밥 한 그릇 같은 사람이 되어라!”
 
오늘은 기쁜 성탄 대축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천사는 목동들에게 나타나 기쁨의 표징을 이렇게 일러줍니다.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
 
목동들은 세상에서 소외된 삶을 사는 대표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목동들은 집도 없고 재산도 없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목동은 우리 모두를 대표하는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입니다. 
 
성탄은 그들이 더는 그럴 필요가 없게 된 날입니다. 우리도 평화와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이유는 구유 위의 아기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없는 삶은 어떨까요? 춥고 배고프고 불안하고 외롭습니다. 이때의 세상은 지옥과 다름없습니다. 
이런 모습을 잘 나타낸 일본 애니메이션 캐릭터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2001)에 나오는 가오나시입니다. 
 
치히로는 아빠, 엄마와 함께 차를 타고 새로운 동네로 향합니다. 
그러다 길을 잃고 기묘한 동네로 들어와 버립니다.
거기에서 엄마, 아빠는 돼지가 되어버리고 치히로는 자신의 이름을 잃고 센이라는 이름으로 그 기괴한 곳에서 버텨내야 하는 상황이 되어버렸습니다. 
 
무섭고 외롭고 허기진 마음을 가오나시는 센이 목욕탕에서 일할 때 상징적으로 잘 나타내줍니다.
이 이상한 괴물은 사람들에게 금을 만들어주며 인심을 사려고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금만 좋아하고 자신을 알아주지 않자 그 허기짐에 사우나에서 일하는 사람까지 다 잡아먹습니다. 
 
센은 아무도 도와주기를 원치 않는 더러운 손님의 시중을 들며 그 손님으로부터 귀한 약을 받아냅니다.
그 약의 반을 잘라 자신을 도와주었던 용 모습의 친구를 치료해 주고 아무나 막 잡아먹는 가오나시에게 먹여
그동안 잡아먹은 것을 다 뱉어내게 합니다. 
 
센은 이런 과정을 통해 자신이 다시 치히로였음을 기억하고 아빠 엄마를 되찾아 그 마을을 나가게 됩니다.
여기서 상처가 치유되는 용이나 가오나시는 바로 이름을 잊어버린 치히로 자신을 상징합니다. 
 
남에게 하기 싫은 일을 해주는 것은 남의 밥이 되어주는 것과 같습니다.
그 과정에서 얻게 되는 것은 상처받은 나 자신을 치유하는 약이고 나 자신의 허기를 채워주는 양식입니다. 
 
내가 양식이 되어줌으로써, 곧 먹힘으로써 나는 진정한 나를 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나에게 어쩌면 돼지처럼 보였던 참 부모의 모습을 발견하여 더는 혼란스럽지 않은 삶을 살아가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세상에 태어난 우리는 모두 치히로처럼 이름을 잊고 상처받고 허기지게 살아갑니다.
이때 동물의 밥통에 양식으로 뉜 한 인간이 된 하느님은 우리도 누군가의 밥이 될 때 진정한 인간의 모습을
회복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내가 내어주며 나의 창조자를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큰가시고기의 부정은 유명합니다. 
큰 가시고기는 둥지를 짓는 유일한 물고기라고도 합니다. 
암컷은 둥지에 알을 낳고 떠나갑니다.
그러면 수컷은 알 냄새를 막기 위해 수풀과 돌들로 방어막을 칩니다.
그리고 수천 개에 해당하는 알들을 일일이 뒤집어주고 바람을 쐐줍니다. 
 
큰 가시고기는 알들에 계속 부채질을 해주고 알을 훔치러 온 녀석들과 싸웁니다.
그래서 먹지도 않고 잠을 자지도 않습니다. 
 
사흘이 지나면 부화가 시작됩니다. 
그러면 큰 가시고기는 더욱 바빠집니다.
먼저 깨어난 새끼들을 돌보고 늦게 깨어나는 고기들을 위해 계속 지느러미로 산소를 공급해줍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어느새 몸은 푸른색으로 변하고 지느러미는 갈라져 더는 물에 뜰 수 없게 됩니다.
새끼를 모두 탄생시킨 5일째 아비 물고기는 힘이 빠져 가라앉아 죽습니다.
그러면 새끼들이 아비 가시고기의 살을 먹으며 바다로 나갈 힘을 얻습니다.
 
큰가시고기는 몸집이 크지 않은데도 가시가 커서 그렇게 이름이 붙여진 것 같습니다.
가시고기가 죽어 봐야 큰 물고기들이 먹으려 해도 손해입니다. 
가시가 큰 것에 비해 먹을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새끼들에게는 큰 이득입니다. 
그 작은 새끼들은 아버지의 살을 가시들 사이로 들어가 먹습니다.
그 작은 새끼 물고기들에게 자기 몸을 주는 물고기가 그것들의 아버지임을 누가 봐도 압니다.
아버지가 아니면 그렇게 목숨을 내어놓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새끼 물고기들은 아버지 물고기를 먹으며 자신들도 그렇게 사랑할 수 있는 사랑도 먹습니다. 
 
부모는 자녀를 낳을 때 ‘사랑’으로 낳습니다. 
모든 창조는 사랑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니 사랑으로 낳은 자녀를 부모는 사랑으로 살리려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때 자신의 피조물에 자신이 창조자임을 밝히는 방식은 어떤 것에 자신의 살과 피를 싸서 양식으로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체를 통해 이 천사의 전함이 지금도 실현되고 있음을 봅니다.
성반이라는 구유 위에 밀떡이라는 이불에 싸여 누워있는 양식이 된 하느님을 봅니다.
그러니 우리도 성체를 보며 구유의 아기를 보던 목동들의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성탄이 기쁜 이유는 단순히 2천 년 전 오늘 예수님이 태어나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 태어나신 예수님을 오늘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매일 성체 안에서 만나 나의 진정한 정체성이 무엇인지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MBC 드라마 ‘밥이 되어라’는 시골에서 밥집을 운영하는 경수라는 총각에게 아버지가 한 여자아이를 맡겨놓고 사라지면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누군지도 모르는 영신이란 아이를 키워야 하는 경수는 막막하기만 합니다.
하지만 영신의 똘똘한 모습에 경수도 정이 들어 영신을 키우며 학교를 보냅니다. 
 
영신은 음식솜씨가 타고났습니다. 그래서 궁궐이란 한식당에 취직하려 합니다.
이때 왜 음식을 만들려고 하느냐는 질문에 영신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허기진 세상에 따듯한 밥 한 그릇 같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이는 허기진 세상에서 자신이 경수에게 따듯한 밥이 무엇인지 그 사랑을 먹었기 때문에 가능한 말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만났다면 바로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처럼 따듯한 밥 한 그릇과 같은 사람이 되기를 원할 것입니다.
그러면 자신의 이름을 찾고 아버지와 어머니를 찾아 더는 아프지 않고 배고프지 않게 살 수 있게 됩니다. 
 
구유 위의 아기 예수님은 밥이 되어야만 참 하느님 자녀가 될 수 있는 약과 양식을 얻게 됨을 알려주는
진정한 우리 기쁨과 평화의 표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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