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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2월 23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1-12-23 조회수 : 1112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어떻게 미움받을 용기를 주는가?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탄생에 관한 내용입니다. 
요한의 아버지 즈카르야는 천사의 말을 믿지 않은 까닭에 혀가 묶여 말을 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사람들이 아기의 이름을 즈카르야로 지으려고 합니다. 당시 보통은 조상의 이름을 물려받는 전통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엘리사벳은 아기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당신의 친척 가운데에는 그런 이름을 가진 이가 없습니다” 하며, 즈카르야를 바라보았습니다.
즈카르야는 글 쓰는 판에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썼습니다. 그때 지금까지 묶여있던 혀가 풀립니다. 
 
즈카르야는 세상 사람들의 시선에 상관없이 하느님 뜻을 실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혀가 묶이는 고통을 통해 세상에 유일하게 가치 있는 일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임을 믿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이기려면 세상이 나를 판단하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아니면 나는 세상 사람들 시선의 노예가 됩니다.
이것을 어쩌면 알프레드 아들러의 『미움받을 용기』라 할 수 있겠습니다. 
도대체 미움받을 용기는 어떻게 생기는 것일까요? 
 
우선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만약 내가 쥔 냄비가 계속 뜨거워지고 있다면 그 냄비를 놓으면 됩니다.
그러나 인간의 생각은 그렇게 쉽게 끊기지 않습니다. 
흰 북극곰을 3초간 생각하지 말아보십시오.
지금 3초간 느닷없이 나온 북극곰의 이미지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사실 우리 뇌는 무언가 생각하지 않으려 하면 더 그 생각에 집중하게 되어있습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다른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자, 북극곰을 3초간 생각해봅시다.
그런데 먼저 지금 시각이 몇 초 몇 분인지 정확하게 저에게 알려주실 수 있습니까?
사람은 두 가지 생각을 한꺼번에 할 수 없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안 좋은 일이 있었다면 다른 것에 신경쓰면 됩니다. 
 
하지만 안 좋은 일이 평생 내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라면 어떨까요?
얼마 전에 꾸르실료 한 봉사자가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대낮에 건널목을 건너는데 음주 운전자에게 치인 것입니다.
워낙 심하게 다리를 들이받아서 걷지 못하게 될 수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몇 달 동안 병원에 누워있다면 생각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실 사람이 생각하는 것이 문제인 것이 아니라 ‘판단’을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자아는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주시지 않은 것에 대해 부정적인 판단을 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자꾸 생각을 부정적으로 끌어내리는 자아가 문제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옳고 그름에 관한 판단을 멈추어야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대낮에 나에게 교통사고를 낸 그 사람의 잘못은 분명 긍정적인 것으로 판단될 수 없습니다. 
 
병실에 누워있는 꾸르실료 봉사자는 절망과 미움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고를 낸 사람이 자주 찾아와 용서를 빌었습니다. 
처음에는 꼴도 보기 싫었지만, 그 사람도 옆 본당에서
핵심 봉사자까지 하다가 어떤 연유로 몇 년 동안 냉담하던 분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이 사건을 계기로 다시 성당에 나가겠다고 했습니다. 
그 사람의 자존심이 무너진 것입니다. 
 
이렇게 그분은 다시 걸을 수 있게 되자 사고를 낸 사람과 함께 성당에 가서 미사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그분을 위해서, 모두를 위해서 그 사건이 ‘좋은 것’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즈카르야는 자신의 혀가 묶인 것이 좋은 것이었습니다. 판단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뜻이 실현되는 기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계속 말을 할 수 있었다면 그는 반성하지 못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이 이름을 즈카르야로 짓겠다고 고집부렸을 수 있습니다. 
 
이렇듯 ‘하느님의 뜻’을 나의 것으로 삼는 사람은 모든 일어나는 일들을 ‘긍정적인 축복’으로 볼 수 있는 눈을 줍니다.
판단을 안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긍정적으로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면 세상을 이기는 사람이 됩니다. 
 
안톤 룰릭 신부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분은 1996년은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사제서품 50주년을 맞는 자리에 초빙되어 이렇게 증언하였습니다. 
 
“저는 알바니아에서 태어났습니다. 
그곳은 제가 사제서품을 받은 직후, 얼마 되지 않아
바로 공산독재치하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서품을 받은 해 12월 19일, 공산정권은 제가 정부에 반대선동을 한다는 구실로 체포한 후 17년간은 감옥에,
그 후 다음 17년간은 노동수용소로 보냈습니다.
 
저의 첫 번째 감옥은 몹시 추운 외딴 산골 마을의 한 작은 화장실이었습니다.
9개월간, 저는 누울 수도, 다리를 펼 수도 없는, 그 비좁고 더러운 곳에서, 그것도 강제로 인분 위에 앉아있어야만 했습니다.
 
서품을 받은 바로 그 해, 성탄절 밤에 그들은 저를 감옥의 1층에 있는 다른 화장실로 끌고 가서 옷을 벗기고 밧줄에 묶어 천장에다 발가락이 겨우 바닥에 닿을 듯 말 듯하게 매달았습니다.
조금씩 조금씩 혹독한 냉기가 전신을 휘감았고 그것이 제 가슴까지 차 올라왔을 때, 심장은 곧 멈출 것만 같았습니다.
갑자기, 너무나 엄청난 절망감으로 저는 크게 소리를 내고 울었습니다.
그러자 저를 심문하던 사람이 달려와 밧줄을 잘라 저를 바닥에 내려놓고 다시 마구 구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바로 그날 밤, 그 더럽고 혹독한 곳에서 저는 참으로 예수님의 강생과 십자가의 의미를 깨달았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그 고통 안에서 바로 저와 함께 제 안에서 힘을 주시는 예수님과 함께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때는 너무도 강하게 저를 지탱해주셨기 때문에 저는 그 고통 중에서도 위로를 느꼈고, 심지어 마음 깊이 신비로운 기쁨이 차올랐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사제로서의 제 삶의 거의 모든 것을 다 빼앗아버린 그 고문자들에게 저는 어떤 미움도 느끼지 않았습니다.
 
1989년, 제가 79세 되던 해, 처음으로 감옥에서 석방되었는데 길거리에서 우연히 저를 고문하던 사람 중 한 사람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저는 곧장 그에게로 다가가 그를 진심으로 껴안았습니다. 
이것이 사제로서의 제 삶이었습니다.”
 
안톤 룰릭 신부는 인간의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사랑의 힘을 체험하였습니다. 
그 극심한 고통 중에 십자가의 장막을 넘은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심장이 찢어졌을 때 장막도 찢어졌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을 십자가에 매다신 것처럼 우리도 우리 자신을 십자가에 매달 때 장막을 통과하게 됩니다.
그 장막을 통과했을 때 그리스도와 만나게 됩니다.
그러면 과거에 있었던 나의 모든 것이 긍정적으로 보이고 나의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용기가 생깁니다. 
 
‘미움받을 용기’는 타인의 평가를 무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일을 ‘하느님의 뜻’ 안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일치시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라면 그 모든 일이 ‘좋은 것’으로 바뀝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의 모든 고통, 그리고 죽음까지도 좋은 것으로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미워하는 사람들도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의 힘입니다. 
 
십자가를 만난 사람들은 그래서 누구도 미워할 수 없는 것을 넘어서서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고 세상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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