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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2월 9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1-12-09 조회수 : 1558

예언자는 주변인인데도 외롭지 않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에 대해 설명하십니다.
세례자 요한은 여자의 몸에서 난 사람 중 가장 큰 사람이지만 하느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사람도 그보다는 크다고 하십니다. 
이는 무슨 말일까요? ‘경계에 선 인간’이란 뜻입니다.
 
이 지상에서는 가장 큰 사람이고 천상에서는 가장 낮은 사람보다 낮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높은 산을 떠올리게 합니다.
에베레스트는 이 지상에서 가장 높지만 하늘의 가장 낮은 곳보다 낮습니다. 
 
우리 모두도 ‘예언자직’을 수행하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을 만나면 어쩔 수 없이 이렇게 천상과 지상의 경계에 서게 됩니다.
문제는 어느 곳에도 속하지만, 또한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매우 외롭습니다.
그러나 또한 새로운 친구들이 생깁니다. 
그 친구들은 천국으로 올라갈 준비를 그 경계선에서 합니다. 
 
요즘 읽은 책, 안나의 집 김하종 신부의 『사랑이 밥 먹여준다』에서 이탈리아인으로서 한국에 뼈를 묻겠다는 심정으로 복음을 전하러 온 경계인으로서의 세례자 요한과 같은 모습을 김 신부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부모와 가족들을 떠나 한국에 왔지만 한국에서도 외국인으로 취급받으며 섞이지 못하는 아픔을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소외감은 익숙한 것이었다. 프랑스에서 프랑스어를 공부했을 때는 사람들이 나를 ‘스파게티’라 불렀고,
영국에서는 ‘마피아’라고 불렀다. 북부 이탈리아에서는 나를 ‘촌놈’이라 불렀다.
아프리카에서는 나에게 거리를 두고 ‘투오밥’(백인)이라 불렀다. 나는 이방인이었다. 
 
한국에서도 비슷한 일을 겪었다. 1990년대 초, 눈이 내리는 일요일이었다.
성당 앞마당에 축제 준비를 하는 젊은이들이 모여 있었다. 밴드 연습이 한창이었고 한복을 입은 몇몇은 춤을 추고 있었다.
음악의 리듬은 하얀 눈발도 춤추게 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들을 흐뭇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그때 어떤 사람이 할머니를 한 분 모시고 내게 왔다.
사제에게 축복받고 싶어 하는 할머니라고 했다. 
그런데 그 할머니는 나를 보자마자 굳은 얼굴이 되었다.
나를 한번 쭉 훑어보더니 화가 난 목소리로 ‘외국 신부한테서는 축복받기 싫네’하고 어깨를 돌리셨다.
가슴이 묵직하게 아팠다. 
여러 지역에서 겪었던 일이라 적응할 때가 됐는데도 말이다. 
 
집에 돌아와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었다. 
‘외국인, 순례 그리고 나의 사람들’에 대해 생각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상을 보면서 ‘외국 사람’이라는 단어에 대해 오래 생각했다. 
‘그렇구나. 나의 얼굴, 눈, 피부색은 한국 사람과 다르구나. 나는 이 땅에서 아직은 ‘손님’에 불과하구나.’”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어느 날 할아버지 한 분이 내 턱수염을 손으로 가리키며 무서운 얼굴로 말을 꺼냈다. 
‘대한민국에서는 유교의 전통이 있어 젊은 사람들은 수염을 기르지 않는다네. 수염을 깎아요.’
나는 곧 답을 드렸다. 
‘네, 깎겠습니다.’
 
그날 저녁에 수염을 깎았다. 
사실 내심 멋진 수염이라고 생각했고 스스로 수염이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며 지냈다.
그러나 어르신의 의견을 존중하는 한국 문화에서 살아가야 한다면 더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그 후 지금까지도 수염을 기른 적이 없다.” 
 
그런데도 김 신부는 한국 여자와 결혼하거나 통장에 거액의 돈을 가지지 않고서는 취득할 수 없는 한국 국적을 얻기 위해 노력했고 한국 문화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이 노력에 대해서는 이렇게 씁니다. 
 
“한국에 함께 온 마우로 신부님과 나는 한국 음식을 먹기가 힘들었다. 사실 난 쌀 요리를 어렸을 때부터 좋아하지 않았다.
처음 먹어본 김치는 신맛이 강했고, 한국에서 사용하는 양념들은 경험해보지 못했던 독특한 맛이었다.
특히 찌개와 떡은 너무 낯설었다. 
 
세네갈에서 봉사할 때 나이 드신 선교사 신부님께서 하신 말씀이 다시 생각났다. 
‘네가 이 사람들을 사랑하면 이 나라 언어가 배우기 쉽다고 할 것이고, 사람들도 너무 착하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서 너에게 보내신 이 사람들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이 나라 언어가 너무 어렵다고 할 것이고,
음식도 맛없고 이 민족을 받아들이기 힘들다고 할 것이다.’
 
나는 다시 마음을 다잡고 생각했다. 
‘아직 이 나라 사람들을 충분히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음식 맛이 없다고 느꼈구나.’
그 말씀을 떠올린 후 한국 음식들을 사서 맛보며, 익숙해지도록 노력했다.
그러면서 한국 음식의 참맛을 조금씩 알게 되었다.
음식뿐 아니라 한국의 모든 것들을 사랑하기 위해 노력했고 정말로 사랑하게 되었다. 
 
사랑에는 상상을 뛰어넘는 힘이 있다. 
쌀밥을 좋아하지 않던 내가 가난한 이웃들에게 쌀밥을 전해주는 신부가 됐다.
정말 먹기 힘들었던 음식 두 가지였던 ‘찌개의 떡’은? 내가 지금 가장 잘 만드는 요리는 ‘김치찌개’다.
노숙인 친구들도, 함께 사는 신부님들도 내 솜씨를 인정해준다. 
그리고 특별한 날, 떡이 빠지면 섭섭하다.
나는 같이 환갑을 맞은 노숙인들과 환갑잔치를 함께 했는데, 무엇보다 많은 분과 떡을 나누어 먹을 수 있어 참 행복했다.”
 
3년 넘게 노모와 형제들, 조카들을 보지 못한 김 신부는 고향에 있는 가족들을 그리워하면서도 한국의 사람들과도 섞이지 못하는 아픔을 겪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조금은 열심히 따르는 우리가 모두 어느 정도 겪게 되는 일일 것입니다.
그렇다고 친구가 생기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아주 겸손한 이들이 친구가 됩니다.
왜냐하면, 경계지역엔 아무나 올라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김하종 신부님이 임대 아파트 단지에서 학원비가 없어 학원에 못 가는 아이들을 위해 봉사자들과 공부반을 운영한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아직도 이탈리아 국적으로 한국에서 주변인으로 느끼면서도 열심히 한국의 가난한 이들과 하나가 되려는 중이었습니다.
 
처음엔 영어만 가르쳤는데 그다음엔 수학, 국어, 농구 교실, 기타 교실, 영화 감상 교실 등도 운영했습니다.
봉사자 40명이 모였고 총 72명의 아이를 가르쳤습니다.
이러는 사이 아이들도 외국인 신부님을 좋아하게 되었고 신부님은 말할 것도 없이 아이들을 좋아했습니다. 
 
1990년 무더운 여름, 나눔 교실 아이들이 학부모를 대동하고 신부님을 찾아왔습니다. 
감사패를 준비해 온 것입니다.
감사패에는 72명 아이의 이름이 하나하나 새겨져 있었고 중앙엔 이렇게 씌어있었습니다. 
‘목련마을 청소년 나눔 교실 지도 신부로서 정열과 성의를 다하여 청소년들에게 꿈과 용기를 주고 사랑을 몸소 가르쳐주신 은혜에 대한 보답으로 72명의 뜻이 담긴 이 패를 드립니다.’
신부님은 감사패를 만지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해맑게 웃던 아이들, 마음 한편에 나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이 자리했구나.
머리를 맞대고 나를 기쁘게 해줄 방법을 오래 생각했구나.’
 
김용규 님의 『나답게 사는 지혜는 숲에 있다』에서 숲에도 경계지역이 있다고 합니다.
숲과 바다, 혹은 숲과 도시의 경계를 말합니다. 
이 지역에서 저 지역으로 가려면 경계를 반드시 지나야 합니다.
경계는 모호하기 때문에 부드럽고 열려 있기에 자유롭습니다. 
 
따라서 이 경계지역에서 자라는 식물들은 대부분 가시를 지닌다고 합니다. 
자신을 동물들에게서 보호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가시덤불 속에 몸을 숨기는 작은 동물들이 있습니다.
이 동물들과 덤불들은 서로 도와가며 이 경계지역을 더욱 풍요롭게 한다고 합니다. 
 
김하종 신부는 고향을 떠나 한국인이 되어 한국에서 주님을 전하는 사람으로 살기 위해 한국 땅을 밟았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던 한국 국적을 한국에 온 지 25년 만인 2015년 11월에 받게 되었습니다.
법무부에서 특별 공로자에게 한국 국적을 부여하는 두 명 중 한 명에 뽑힌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 몸에서 난 가장 큰 사람이면서 하늘 나라 가장 작은 사람보다 작은 예언자직을 사는 우리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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