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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2월 6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1-12-06 조회수 : 1700

죄는 왕권과 관련된 문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병자를 데리고 온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 병자를 치유해 주십니다. 
병의 치유보다는 죄의 용서가 먼저입니다. 
그런데 죄의 용서는 병의 치유와 함께 일어납니다.
이렇게 보면 믿음이 있었던 중풍 병자의 친구들은 중풍 병자가 죄를 용서받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남에게 죄책감을 들게 만드는 사람도 있고 죄의식을 갖게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죄책감은 나쁜 것이고 죄의식은 좋은 것입니다. 
 
죄책감과 죄의식을 구분하는 법은 단순합니다. 죄책감은 자기 스스로 벗어나려고 노력하는 것이고
죄의식은 신에게 용서받으면 된다고 믿는 것입니다. 
 
사람은 희한하게 죄책감을 선택하여 사는 사람도 있고 죄의식을 선택하며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는 나의 선택입니다. 
오늘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죄책감을 선택하여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죄를 용서받을 방법은 매우 어려워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죄책감을 즐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는 용서받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죄를 짓는다는 말은 자아에게 순종한다는 말인데 자아에게 순종한다는 말은 자아를 하느님보다 높은 위치에 둔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자아는 죄를 짓게도 만들고 그것으로 자신이 하느님이 되어 자기 자신을 심판합니다.
그렇게 되면 ‘죄책감에 괴로워하는 나’와 ‘심판하는 맛을 즐기는 자아’ 사이에서 혼란을 겪게 됩니다.
둘 다 결국 자신이기에 나는 슬프면서도 기쁜 이상한 상황에 놓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죄를 지으며 내가 자아를 더 높여준 까닭에 나는 ‘자아의 기분’을 더 따라주는 사람이 됩니다.
이렇게 모두 태어납니다. 이것이 원죄입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중풍 환자처럼 영원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합니다.
구원이란 내가 왕으로 치켜세워 그것으로부터 심판받는 나를 불쌍히 여겨 자아의 왕관을 벗겨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나의 힘으로 할 수는 없습니다. 
이런 상태가 오늘 중풍 병자의 모습입니다. 
 
요즘 넷플릭스 ‘지옥’이 인기이다 보니 지옥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은 사이비나 하는 것이라 여기게 됩니다.
하지만 만약 오늘 중풍 병자가 예수님께 나아오지 못했다면 어땠을까요? 지옥입니다.
왜냐하면, 죄를 용서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구원을 심판보다 강조해야 하는 것은 맞지만 심판을 무시하고 구원을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 드라마의 문제는 ‘구원’이 없다는 것에 있습니다. 지옥 고지를 받으면 그냥 지옥에 가야 합니다.
이것이 죄책감을 즐기는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그러나 용서가 있음을 말하는 사람들은 ‘죄의식’을 조장하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 나아가기만 하면 용서를 받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안의 죄를 의식하게 만드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믿음이 있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용서’를 청했다면 어땠을까요? 하느님은 바로 용서해 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 상대의 잘못이라고 말하며 서로 심판하였습니다. 
이들은 죄책감을 즐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죄책감으로 사람을 심판하거나 어떤 목표를 이뤄내기 위한 에너지로 사용합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스스로 죄책감을 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무지’(無智)에서 나옵니다.
아는 것이 없는 것이 아니라, 지혜가 없는 것입니다.
죄책감은 어떤 일에 있어서 내가 나의 탓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심판은 항상 우월한 사람이 더 낮은 사람에게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내가 내 안에 나를 심판해도 된다고 허락해 놓은 우월한 존재가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그 우월한 존재가 자아임을 압니다. 
 
친구들은 자아를 왕으로 여기며 자기 자신으로 여기는 사람을 주님 앞에 놓이게 만들어 ‘죄의 용서’를 받게 합니다.
죄의 용서를 받게 만드는 이유는 자기의 죄가 자아의 탓임을 인정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야 그놈의 왕관을 벗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죄를 용서해 주시는 그분을 새로운 왕으로 삼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로부터의 해방입니다. 
 
죄는 자아에게 왕관을 씌우는 것이라면 죄의 용서는 그 왕관을 벗겨 그리스도께 씌우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 용서를 청하는 것은 자아의 왕관을 빼앗아 주님께 드리고 자아를 왕의 자리에서 폐위시키는 것입니다. 
 
자크 루이 다비드가 1807년 완성한 ‘나폴레옹의 대관식’이란 그림이 있습니다.
마치 대관식의 한 장면을 그대로 그려놓은 듯한 생생한 사실적 표현이 일품입니다.
실제로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실존 인물이며, 당대 사람과 참석자들은 대관식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얼굴을 이 작품에서 찾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작품은 대관식의 한 장면을 그대로 그린 것은 아닙니다.
실제 상황과 세부적인 표현이 조금씩 다른 부분이 여럿 있습니다.
대관식이 가장 잘 보이는 발코니에서, 위엄 있게 차려입고 대관식을 흐뭇하게 지켜보는 귀부인이 앉아 있는 모습이 보이시나요? 이 귀부인은 나폴레옹의 어머니인 레티치아입니다. 
 
레티치아는 나폴레옹이 황제에 등극하는 것을 반대했습니다. 
나폴레옹의 실책이라 생각했고, 나폴레옹이 황제가 되는 것을 반대하고 나폴레옹이 권유한 정략결혼도 거부했다가 쫓겨나다시피 했던 남동생 뤼시앵 쪽을 편들었지요. 레티치아가 나폴레옹에게 돌아온 것은 나폴레옹이 폐위된 뒤였습니다.
이를 두고, 레티치아의 전기인 『나폴레옹 어머니 레티치아』에서는 레티치아가 무조건 가장 고난에 처한 아이의 편을 든 것이라고 해석한 바 있습니다.
실제로 어머니 레티치아는 나폴레옹의 대관식에 끝내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나폴레옹 뒤쪽에 흰 제의를 착용하고 앉아 있는 인물은 교황 피우스 7세입니다.
교황이 대관식을 치르기 위해 친히 파리까지 왔지만, 나폴레옹은 결국 스스로 관을 써버렸다는 이야기로도 유명한 그 인물입니다. 
이런 일에 심기가 불편했던 것인지, 피우스 7세는 대관식 내내 소극적으로 대처했습니다.
하지만 ‘나폴레옹의 대관식’에서, 교황은 손을 들어 친히 나폴레옹을 축복하는 손짓을 취하고 있지요.
실제 역사기록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그림의 스케치 단계에서도 교황은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있었습니다만, 도중에 일부러 수정한 것입니다.
레티치아 부분과 마찬가지로, 그리고 훨씬 노골적으로 나폴레옹의 정당성을 역설하는 쪽으로 그림을 수정한 것이지요.
[출처: 다비드의 ‘나폴레옹의 대관식’, 다음 블로그, ‘이리에시아의 이야기’]
 
나폴레옹이 그랬듯이 죄는 자기 스스로 자아에게 왕관을 씌우는 것을 말합니다.
나폴레옹이 교회도 어머니도 저버린 죄를 어떻게 갚으면 될까요? 어머니에게 돈을 많이 드려야 할까요,
아니면 교회 건물을 지어주면 될까요? 혹은 그림만 수정하면 될까요? 
 
왕관을 벗어 교회에 주며 교황과 어머니에게 용서를 청하는 일밖에 없습니다. 
그것만 하면 됩니다.
다른 방법으로는 이 죄에서 돌아설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에게 누구도 그런 제안을 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죄의식을 갖게 할 진정한 믿음을 가진 친구가 없었던 것입니다.
누가 감히 나폴레옹이 스스로 쓴 왕관에 손을 댈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나폴레옹의 믿음이 한순간에 그렇게 되었을까요? 어렸을 때는 신앙이 깊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자신은 용서받을 필요가 없다고 여겼겠고, 그렇게 시간이 흘러 조금씩 뜨거워지는 물에서 개구리가 익어버리는 것처럼 영원히 주님 앞에 나아올 수 없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어린이 때 첫 고해를 했을 때의 죄의식을 성인이 되어서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야 자아의 힘에 사로잡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용서를 청해야 자아의 왕관이 벗겨져 자유롭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은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라는 기도를 쉼 없이 바치도록 하셨습니다. 
 
이 기도문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항상 죄인입니다.
누가 화가 없고 성욕이 없고 소유욕이 없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음탕한 눈으로 바라보기만 해도 간음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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