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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2월 3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1-12-03 조회수 : 1530

부모에게 ‘경계존중교육’을 받지 못한 자녀가 세상에 나오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눈먼 사람 둘을 치유해 주십니다.

그 전에 예수님은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십니다.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너희는 믿느냐?”

 

믿음의 내용은 하느님께서 사랑이시다는 것도 있지만 하느님은 전능하시다는 것도 있습니다.

사실 사랑이 곧 능력입니다.

어쨌든 예수님은 당신의 능력을 믿는 이들에게 은총을 베푸십니다. 

 

왜 우리를 사랑하시면 알아서 다 해 주셔야지 굳이 당신의 능력을 믿고 청하는 이들에게만 은총을 주실까요?

이는 능력 있는 분의 특징입니다.

바로 자신에게 의존하게 만들되 흔들리지 않도록 경계를 두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에덴동산에서 에덴동산을 내어주시되 선악과는 바치게 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내가 없으면 넌 죽어. 그래서 다 해주냐? 물론. 그러나 내가 하느님임을 잊지 마. 네가 선을 넘는 것을 막기 위해 나에게 선악과 하나는 좀 바쳐줄래?”입니다. 

 

만약 부모가 다 내어주기만 하되 부모로서의 권위와 경계를 알려주지 않으면 어떨까요?

사람 사이에 경계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면 큰일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경계 없이 침범할 수도 있고 또 나도 그렇게 침범당해도 되는 줄 압니다. 

 

『벼랑 끝, 상담』에 ‘시누이로 인한 피해망상’이란 사례가 있습니다.

남편이 위로 누나가 5명, 여동생이 1명 있는데 아내는 시누이들이 자신을 감시한다고 여깁니다.

특별히 큰 시누이는 돈이 많은 사람인데 결혼할 때 도움도 받았기에 거의 엄마뻘 되는 시누이에게 이루 휘둘리고 저리 휘둘리며 살았습니다. 

 

시누이들은 학벌에 대한 열등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대학물 먹은 동생의 아내를 무시하고 깔보고 핍박했습니다.

더군다나 남편이 몇 년 동안 외국으로 출장을 가야 했기 때문에 아내는 그 이야기를 남편에게 하지도 못하고

꾹 참다가 결국 조현병 증상까지 온 것입니다. 

 

시누이들도 물론 문제지만 피해자도 문제입니다.

큰 시누이가 들어와서 낡은 옷들을 자기 맘대로 꺼내 버리고 자기가 좋은 옷 사준다고 나가서는 마음에 들지도 않는 것들만 사주는 것을 허락했기 때문입니다.

그 시누이의 횡포에 좌지우지되는 것이 잘 사는 것인 줄 알았던 것입니다. 

 

시누이들이 그렇게 된 데에는 시어머니의 역할이 컸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을 함께 살면서 묵인했던 것입니다.

어머니는 딸들에게 사람 사이에는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음을 알려주지 못했습니다.

딸들에게 무언가 항상 못 해 준 것이 많다는 생각에 선을 설정해주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 미안한 마음은 자신과 자녀와의 경계선을 허물고 자신은 자녀에게 너무 집착하고 자녀는 부모의 영역까지 침범해도 된다고 여기게 만든 것입니다. 불완전한 부모는 있어도 불완전하게 사랑하는 부모는 없습니다.

부모는 최선을 다한 것입니다.

그러면 못 가르쳤다고, 딸만 많이 낳았다고 미안해할 필요 없습니다.

오히려 미안해하는 마음이 자녀들을 망칩니다. 

 

부모는 에덴동산의 주인과 같습니다.

이미 다 주었습니다.

그런데도 자녀가 만약 선을 넘으려 한다면 어떻게 할까요?

온유하고 자비롭게 모든 것을 다 해 주어야 할까요? 능력 있는 부모라면 모든 것을 다 들어주지 않습니다.

그것을 들어주지 않아도 이미 주는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능력 있는 부모는 자녀에게 애정을 갈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녀가 기분 나쁘더라도 겸손하게 청하는 것이 아니라면, 또 그것을 꼭 해 주어야 하는 상황이 아니라면 자녀를 돕지 않습니다.

부모의 역할은 자녀를 독립시키는 것이지 자신에게 의존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부모는 어떨까요? 

 

‘EBS 육아교육’에서 ‘의존형 아이를 만드는 엄마들의 심리에 대한 실험’을 해 보았습니다.

단어들로 문장 만들기를 하는 것인데, 미국 엄마들은 아이들을 전혀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의 일이니 아이들에게 맡깁니다.

그러나 한국 엄마들은 자주 간섭을 합니다.

아이들의 능력을 테스트하는 것인데 엄마들이 관여합니다. 

어떤 아이들이 자존감이 큰아이로 성장할까요?

당연히 아이가 자신의 힘으로 그 문제를 풀 수 있다고 믿어준 미국 어머니의 자녀들일 것입니다. 

 

우리 부모는 아이들에게 다 내어주고도 항상 ‘미안한 마음’을 가집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아이들은 나의 것이 아닙니다.

먹여주고 재워주고 입혀주고 교육해 주어 세상에 내보내면 할 일은 다 한 것입니다.

나머지는 자녀들이 ‘혜택’이라고 여겨야 합니다. 자녀들이 부모에게 먹여주고 재워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마음을 가지게 해야지, 해주면 해 줄수록 더 요구하고 되고 그러면 교만해져서 아무리 많이 해줘도 부모에게 불만을 품게 됩니다.

자녀가 부모에게 불만을 품으면 그것은 부모 탓입니다. 자녀의 교만을 너무 자라도록 내버려 두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 예수님처럼 부모의 능력을 믿고 부모에게 겸손하게 청할 때만 들어주어야 합니다.

남들은 눈이 다 보이는데 자신만 안 보여서 하느님께 불만을 품는다면 하느님은 그 사람에게 은총을 주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생명을 주었으면 고마워해야 하는데 선을 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겸손하게 청하지 않으면 들어주지 마십시오. 교만해지고 교만해지면 아무리 많이 해줘도 결국 그 자녀는 부모까지 잡아먹게 됩니다.

휘둘리지 않는 힘도 자존감입니다. 

그런 자존감 있는 부모에게 자존감 있는 자녀가 태어납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미안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자녀가 사람과 하느님, 그리고 사람 사이에도 질서와 경계가 존재함을 배우지 못합니다.

예수님도 아버지와의 경계를 존중하시며 사셨습니다.

부모에게서 경계존중교육을 받지 못한 자녀는 세상에서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이 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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