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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2월 2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1-12-02 조회수 : 1409

배움의 가장 큰 적: 자기 수준을 모르는 것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산상설교를 마치신 다음 결론적으로 ‘실천’에 관하여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라고 하십니다.

배움이 실천으로 옮겨지지 않으면 알게 된 게 아닙니다. 나의 앎은 곧 나의 삶입니다.

실천 없는 배움은 곧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아는 수준은 정확히 내가 실천하는 것만큼만입니다.

 

우리는 실천의 중요성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실천 없이 자꾸 더 배우려 합니다.

이것이 진전을 방해합니다.

기둥만 세우다가 무너지고 또 무너지고 하는 것입니다. 

 

제가 신학교 다닐 때 ‘가난’이란 주제에 대해 학술발표회를 한 적이 있습니다.

발표자들은 신학교의 교수 신부님들이었습니다.

신부님들이 가난에 대한 성서 신학적 연구, 교의 신학적 연구, 영성 신학적 연구 결과를 발표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려했던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질의응답 시간에 어떤 신자분이 이렇게 질문해버린 것입니다. 

“정말 훌륭한 연구들 잘 들었습니다.

그런데 신부님들은 가난하십니까?”

 

그때 잠깐의 정적은 많은 생각을 하게 했습니다.

한 신부님이 유학할 때 돈이 없어서 힘들었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그러나 ‘지금’에 해당하는 대답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저도 가난에 대해 많은 말을 하고 있지만 누가 “신부님은 가난하십니까?”라고 물으면 저는 “아니요.”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절대 가난하지 않습니다.

이 말은 “가난에 대해 나는 모릅니다.”라는 말과 같습니다. 

 

하지만 성 프란치스코에게 물어보면 어떨까요?

가난을 즐겁게 사셨던 분이기에 당신은 가난을 조금은 안다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몸이 따라가지 않는데 감히 안다고 하지 맙시다.

이런 착각이 발전을 저해하고 현학적 허세에 빠지게 만듭니다. 

 

이것은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유튜브에서 저는 깜짝 놀랄 섬네일을 보았습니다.

수녀님들의 뒷모습이 보이고 가톨릭 신자도 아닌 사람이 수녀님들에게 강의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묵상기도와 관상기도를 주제로 강의하고 있었습니다.

정말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장면입니다. 

 

이 강사는 약간 종교 다원주의나 뉴에이지 성향이 강한 가르침을 하고 있었습니다.

양심만 따르면 된다고 하고 양심의 작용이 성령의 작용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크게 틀린 말은 아니지만 완전히 옳지도 않습니다. 이를 ‘혼합주의’라고 합니다. 

 

사실 혼합주의는 95% 정도는 맞는 말입니다.

문제는 5%의 독이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물이 95%이고 그 안에 5%의 독이 들어있으면 그것은 마실 물일까요, 아니면 빨리 버려야 할까요?

이런 가르침을 수녀원에서 했다는 것은 놀라울 따름입니다. 

 

게다가 관상은 “몰라!”만 하면 된다고 합니다. 이분은 『무지의 구름』을 읽고 자신이 주장하는 방법과 일치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지금도 누구나 관상의 상태에 들 수 있다며

“여러분도 ‘몰라!’ 해보세요.

여러분 이름도 모르죠? 나이도 모르죠? 지금 어디 있는지도 모르죠? 이것이 관상의 상태입니다.

가톨릭도 이렇게 누구나 깨달음이나 관상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가톨릭에서 불교에서 순간적인 깨달음으로 득도하는 것처럼 그런 가르침을 주지는 않습니다.

우리 영성엔 정화-조명-일치, 소리기도-묵상기도-관상기도와 같은 순서와 수준이 존재합니다.

 

만약 걷지도 못하는 아이에게 달리기를 가르치면 어떨까요?

자전거도 못 타는 사람에게 오토바이를 타는 법을 가르치면 어떨까요?

오토바이를 5초 동안 균형을 잡고 타다가 넘어지고 한다면 이 사람은 오토바이를 탈 줄 아는 것일까요?

어디가 부러지고 나서는 다시는 자전거도 타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나의 수준을 무시한 공부와 기도가 이렇습니다.

 

누구든지 자신의 수준에 맞는 것을 배울 때 기쁘고 더 배우고 싶은 것입니다.

그렇게 차근차근 나아가야 실력이 느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수준은 내가 지금 ‘기쁘게 매일 실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묵주기도를 드리는 것이 기쁘고 삶에 도움이 되면 그것을 하십시오.

책을 읽는 것이 기쁘거나 동영상 보는 것이 즐거우면 그것을 하십시오. 그게 내 수준입니다.

소리기도 단계에 있는 사람에게 묵상기도를 강요하면 나중엔 소리 기도까지 포기하게 됩니다.

 

가난을 실천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가난에 대한 논문을 쓰라고 하면 나중엔 신학 공부 자체에 대한 맛을 잃습니다.

내가 배움의 진전이 없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내 수준을 내가 잘 모르고 무언가를 배울 때입니다.

많은 경우에 소리기도 단계에서 벗어나야 하는 사람이 그것에만 머무르거나 혹은 묵상기도를 해야 하는 사람이 관상에 도전할 때 생깁니다.

실천은 하나도 없는데 신학원에 입학하여 머리만 키울 때도 같은 상황이 벌어집니다.

실천이 없는 배움은 아무 쓸모가 없고 오히려 몸에 해롭습니다. 

 

사회에서 나의 수준을 아는 것을 ‘메타인지’라고 합니다.

일반 학생들과 비교했을 때 0.1%의 상위 학생들의 특징은 사교육 의존도가 거의 없다고 합니다.

그들이 학원에 가는 이유는 자신들의 부족한 면을 채우기 위해서입니다.

나머지는 혼자 합니다. 

그러면 왜 일반 학생들은 학원에 갈까요? 

“불안해서!” 이것이 이유입니다.

 

자기가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 모릅니다.

그냥 불안하니까 남이 하는 것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실력 차이를 만듭니다. 저도 고등학교 때 무작정 문제집만 풀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교과서를 보지 않게 되었고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 모르게 되었습니다.

결과는 가장 많은 시간을 투자한 수학이 가장 저조한 점수를 받는 것이었습니다. 

 

많이 알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의 수준에 맞는 것을 해야 합니다.

지금 내가 실천하지 못하는 것이 내가 노력해야 하는 부분입니다.

나를 변화시키지 못하는 공부나 기도는 하지 마십시오.

나를 더 가난하게 만들고 더 절제하게 하고 더 겸손하게 만드는 공부를 하십시오.

나의 변화에 영향을 주지 못하는 공부는 잘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화 ‘리미틀리스’(2011)는 책을 쓰는 남자 주인공이 책도 쓰지 못하고 가난하게 되어 여자친구와도 헤어져

결국엔 한 알만 먹으면 엄청난 재능이 솟아나는 약을 먹게 되어 많은 돈을 벌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그 약에는 부작용이 있습니다.

기억력 상실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데 살인 용의자가 됩니다.

 

무엇이든 급작스럽게 뛰어넘으려 하면 문제를 일으킵니다.

그 약에 의존했던 사람들은 정신병자가 되거나 범죄자, 혹은 자살 등으로 삶을 마감합니다.

 

물론 ‘굿 윌 헌팅’(1997)의 ‘윌’과 같이 자신이 천재임에도 이것을 인정하지 않고 청소부로 일하며

교수를 비웃는 삶을 사는 것도 문제입니다. 

나의 정확한 위치를 알아야 내가 지금 해야 할 공부와 기도 수준을 알고 그래야 삶을 변화시키는 진전 있는 노력을 할 수가 있습니다. 

 

기도나 공부가 끝나면 그것이 나의 삶을 변화시켰느냐, 아니냐를 봐야 합니다.

나의 삶이 변화될 때 그것이 진짜 나의 지식이 된 것입니다.

행동이 변화되는 것을 보며 기뻐해야 지금 나의 올바른 수준을 알고 정진할 수 있습니다.

나의 행동을 변화시키는 공부와 기도를 합시다.

그래야 진전이 있습니다.

 

공부하는 맛이나 기도의 맛이 아니라 내 삶이 변화되는 것에서 기쁨을 찾아야 합니다.

살지 못하는 것은 결국 모르는 것입니다.

죄를 지으며 기도의 수준만 높이려는 우리가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영성과 지식은 죄로부터의 벗어남과 함께 가야 재미도 있고 무너지는 일이 발생하지 않습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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