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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1월 25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1-11-25 조회수 : 1796

희망 없는 사면초가 상황에서 영웅이 되려 하지 마라

 

오늘도 예수님은 ‘종말’의 상황에 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루살렘이 적군에게 포위된 것을 보거든, 그곳이 황폐해질 때가 가까이 왔음을 알아라.

그때에 유다에 있는 이들은 산으로 달아나고, 예루살렘에 있는 이들은 거기에서 빠져나가라.

시골에 있는 이들은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지 마라.

그때가 바로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이 이루어지는 징벌의 날이기 때문이다.”

 

적군에게 포위되었을 때 우리는 나라를 위해 끝까지 항생을 해야 할까요? 아니면 살 방법을 모색해야 할까요?

만약 살 방법을 모색하다가는 나중에 나라의 큰 배신자 소리를 들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적군에게 포위된 상황’, 곧 ‘사면초가’에 놓이면 도망치라고 합니다.

계속 싸울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 이유는 ‘징벌’이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이 바빌론에 포위된 적이 있었습니다.

이때 예레미야 예언자는 항복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 그런 소리를 하느냐며 예레미야 예언자를 가두고 박해하였습니다.

결과적으로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예레미야의 말을 안 들은 치드키야 왕은 두 눈이 뽑히게 됩니다.

이것이 예루살렘의 첫 번째 멸망입니다. 

 

상황이 더는 가망 없을 때 그것을 ‘하느님의 징벌’로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말 그대로 개죽음을 당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위한 항전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나라의 자존심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꼴이 됩니다. 

 

분명 로마에 의한 예루살렘의 두 번째 멸망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리스도를 죽인 이들을 향한 하나의 예고된 징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끝까지 항전하였습니다.

그 항전을 하느님의 이름으로 하였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자기 나라의 자존심을 위해 한 것입니다. 

 

이들이 끝까지 항전했던 곳이 ‘마사다’입니다. 

결국, 마사다에게 항전하던 이들은 모두 자살을 하게 됩니다.

지금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마사다 항전을 기리며 끝까지 항전한 이들을 추켜올립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느님을 위해 싸웠다기보다는 나라를 위해 싸운 것입니다.

이 세상 지나버릴 왕권을 위해 귀한 목숨을 바친 것입니다.

우리가 왜 영혼을 구원해주지도 못할 것을 위해 목숨을 내어버려야 할까요? 

 

마지막 때가 오면 분명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마지막 때는 온 세상이 공격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하늘에서 무언가 떨어지고 땅이 갈라지고 바다가 덮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완벽하게 사면초가가 되었다면 이것은 ‘하늘의 징벌’로 여겨야 합니다.

이때 반항해 봐야 내 영혼을 돌볼 기회를 잃을 수도 있습니다.

 

주님 뜻대로 잘살고 있는데 망하는 교회나 망하는 사회나 망하는 나라는 없습니다.

사면초가가 되었다면 그것은 전체적으로 잘못된 길로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징벌은 받아야 합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이런 때에 해야 하는 유일한 것은 ‘말씀과 은총’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을 라합이 잘하였습니다.

라합은 창녀였지만 자신이 사는 예리고가 자신보다 더 썩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분명 징벌이 내릴 것을 느끼고는 징벌을 내리는 이들을 숨겨줍니다.

두 명을 숨겨주는데 저는 이 둘을 ‘은총과 진리’로 봅니다.

라합은 자기 나라에서 배신자가 되었지만, 자신과 가족의 목숨을 부지하였습니다. 

 

우리는 우리나라의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영혼을 구원받기 위해 태어났습니다. 유토피아를 건설한다는 식의 말로 우리를 이용하려는 세력에 속아서는 안 됩니다.

공산주의를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피를 흘렸습니까?

그러나 그 피의 값을 하느님은 기쁘게 쳐 주실까요? 왜 그랬냐고 하실 것입니다.

일단 역전이 불가능한 상황이라면 그 상황을 받아들이고 우리 안에 주님께서 함께 계시도록 노력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유일한 일입니다. 

 

1968년 북한 특수부대 124군 소속 31명 특공대원이 청와대를 습격하기 위해 서울 세검정까지 내려왔습니다.

그들이 산속에서 마주쳤다가 살려준 지게꾼 형제들의 신고로 서울은 이미 경계태세에 있었습니다.

결국,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고 김신조를 제외한 모든 대원이 전투 중 사살되었습니다.

 

바위틈에 숨어있던 김신조도 죽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고민합니다.

이미 주위는 포위되어 살 가망성이 없었고, 항복하면 살려주겠다는 말이 들려옵니다.

문득 ‘나는 누구인가?’란 질문을 자신에게 던집니다.

 

‘나는 김일성 수령을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하는 존재인가?’

그는 항복합니다.

그래서 유일하게 살아남습니다.

그리고 그 질문을 멈추지 않습니다.

북한은 자신들을 보낸 적이 없다고 잡아뗍니다.

분노를 느끼고 항복하기를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목사가 되는 길을 택합니다. 

 

누가 김신조 목사를 탓할 수 있을까요? 북한은 분명 배신자라 낙인찍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영혼 구원을 책임지지도 못할 세상 권력을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세상은 마치 미국 드라마 ‘프리즌 브레이크’처럼 점점 절망의 나락으로 가고 있습니다.

물론 그 속도를 늦추기 위해 노력해야겠지만 이때 이 세상 편에 서서 하느님의 진노가 가까워지는 데도

이용만 당하다 죽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내가 적들에게 포위되었다면 분명히 이 상황은 하느님의 진노 결과임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구원하러 이 감옥까지 들어온 이를 찾아야 합니다.

이것은 비겁함이 아닙니다.

내가 누구인지, 이런 상황이 왜 일어나는지 묻는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프리즌 브레이크에는 무죄하게 무기징역을 받은 형을 구원하기 위해 들어온 동생이 있습니다.

동생은 온몸에 탈출할 수 있는 암호가 적힌 문신을 하고 있습니다.

영원히 죄도 없이 살아야 할 감옥을 탈출한다고 비겁하다고 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 안에서 영웅이 되려는 것이 어리석은 행위입니다.

하느님의 징벌 아니고 사면초가가 되는 상황은 거의 없습니다.  

 

그때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드십시오.

우리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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