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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1월 24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1-11-24 조회수 : 1485

죽음과 가까울 때 성령께서 충만히 오시는 이유: 명의는 작은 병에 움직이지 않는다 
 
어제 복음은 세상 종말이 언제 올 것이냐는 제자들의 질문에 예수님께서 그것을 알려고 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오직 죽음을 현재화하여 자신을 좀 더 가치 있는 사람으로 만들 수 있는 존재는 인간밖에 없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죽음을 바로 눈앞에 두고 사는 것이 나에게 매우 유익합니다.
 
그러면 어차피 죽기 때문에 조금 더 생존하기 위해 세상 것을 추구하기보다는 ‘가치와 의미’를 추구하는 사람으로 변화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자신 안에 생존을 위한 세속적인 것들이 아니라 ‘사랑’을 채우게 됩니다.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에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죽음을 현재화하여(Memento mori) 살다 보면 당연히 두려움을 가지게 됩니다. 
그런데 이 두려움을 가지면 하느님은 성령을 주십니다.
죽음을 이기게 하는 힘은 성령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성령님을 원한다면 죽음을 목전에 두고 사는 것이 좋고 그렇게 성령님께서 오시면 내가 주님을
증언하는 사람이 됩니다. 
 
자주 말씀드리는 김용태 신부님의 서품 준비 피정 중에 있었던 체험을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마지막 이전에 항상 당신 제자들이 박해를 당하게 될 텐데 그때 성령의 힘으로 주님을 증언할 기회가 될 것이란 말씀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김용태 신부가 사제가 되기 위한 한 달 피정을 하던 중에 자신의 마음에 “순교를 할 수 있느냐?”라는 주제가 떨어졌습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마지막 후손으로서 이 주제는 어렸을 때부터의 평생 화두였습니다. 
 
이냐시오 묵상이기 때문에 상상으로 순교 장면을 떠올렸습니다.
이슬람 테러범들이 등장하였고 지독한 고문 기구들이 있었으며 배교하지 않으면 드릴로 머리를 뚫어서 죽이겠다고 협박하였습니다. 
참아보려 했지만, 순교 직전에 매번 기도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른 부제들은 다 이 과정을 통과하였지만, 김 부제만은 사흘이 지나도 머리로 뚫고 들어오는 그 드릴의 칼날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피정과 서품을 포기할까 생각도 하였습니다. 
 
이젠 마지막이란 마음으로 밤에 혼자 성체조배를 하러 올라갔습니다. 
다시 같은 묵상을 하였습니다.
또 드릴이 머리로 오고 또 포기하려고 할 때 즈음, 온 방 안이 사랑으로 가득 차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마치 바닷물을 담아보겠다고 그렇게 애썼던 잔이 바다에 빠진 느낌과 같았습니다.
그분의 사랑으로 자신이 온통 채워지는 느낌이었고 주님께서 뒤에서 꼭 안아주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러며 예수님께서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고 하늘에서는 아름다운 빛이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순교 다음의 세상이었습니다. 
 
이 은총을 체험한 후에 순교를 받아들일 힘이 생겼습니다. 
이 체험은 사제로 살아가는 내내 힘이 되어주었습니다. 
만약 김용태 신부가 며칠 동안 계속 죽음을 현재화하는 두려운 상황을 묵상하지 않았다면 이런 은총이 주어졌을까요?
그럴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온전히 주님을 증언하는 사제도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어쨌거나 우리를 성장시키는 것은 죽음의 현재화이고 그런 노력을 하는 사람에게 주님은 죽음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힘은 성령님을 주십니다. 
그리고 그것이 매순간 당신을 증언하는 힘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매 순간 주님을 증거할 수 있을 때, 그 사람은 이미 죽음 이후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는 수도자나 성직자와 같은 부르심을 받은 사람에게만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며칠 전에 1년 전 남편을 뇌종양으로 여읜 아내와 20살 먹은 딸이 찾아왔습니다.
외국을 돌아다니며 살아야 하는 직업을 가지고 있었지만, 갑자기 암이 찾아왔고 1년 10개월의 투병 끝에 사망하였습니다.
연년생 고3 여동생과 중학생 남동생을 둔 맏딸 카타리나는 외국에서 생활하다 갑자기 아버지의 병환으로 한국에 들어올 수밖에 없어서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습니다.
 
어머니의 권유대로 일단 대안학교에 입학하기로 하였는데 시간도 없고 어찌하다 보니 개신교 학교에 입학하게 됩니다.
여동생과 자신, 단둘만이 가톨릭 신자였습니다. 
 
어느 날 수련회에 따라가게 되었습니다. 
개신교 학교이기 때문에 기도회가 열렸습니다.
카타리나는 사진 찍는 일을 하며 약간 그런 기도회를 바라보는 처지에 있었습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이 무슨 말이라도 하며 기도를 해보려 했습니다.
당시에 맏딸이라는 부담과 아버지가 아프시지만, 어머니가 아버지로 인해 고생하는 것을 보며 이럴 바에 아버지가 빨리 돌아가시는 게 나을 거 같다는 생각도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동생은 미술과 같은 특기가 있지만 자신은 앞으로의 삶이 조금은 막막한 상태였습니다. 
 
이때 김용태 신부님과 같은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그 친구 말로는 성령께서 쑥 안으로 들어오는 느낌을 받았다고 합니다. 
성령은 사랑이십니다.
그 사랑과 위로에 눈물을 흘리고 있을 때 선생님이 와서 귀에 대고 계속 기도를 해 주셨고 그 기도 말이 꼭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하는 소리로 들렸습니다.
그렇게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담대해질 수 있었습니다.
 
주님은 죽음을 목전에 둔 이에게 성령의 은혜를 주십니다.
성령께서 제일 좋아하시는 것은 우리를 죽음의 공포에서 해방하시는 것입니다.
죽음만큼 강한 적도 없다면 하느님은 그 강한 적을 이기게 하실 때 가장 보람을 느끼실 것입니다. 
 
그렇게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그때의 감정은 점점 식어만 갔습니다.
무언가 모를 불안과 죄책감 같은 것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버지의 죽음을 이길 힘을 얻었지만 죽음 이후를 극복할 힘은 남아있지 않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어머니와 함께 미사를 가서 성체를 영하고 기도를 바치려 하는데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도저히 기도가 안 되어 그냥 눈을 뜨려는데 환시와 같은 것을 봅니다.
빛과 같으시고 엄청나게 크셔서 감히 바라볼 수 없는 예수님께서 서 계시고 그 앞에 어린아이처럼 해맑게 웃고 있는 아버지를 본 것입니다.
마치 어머니 품에 안겨있는 아기처럼 행복한 모습의 아버지셨습니다. 
하염없이 감사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아버지의 죽음과 맏딸로서의 부담, 그리고 아버지가 빨리 죽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던 죄책감, 또 외국에서 생활하다 우리나라 들어와서 느껴야 하는 청년으로서의 막막함 등을 주님께서는 성령으로서 극복하게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베로니카는 자신이 그렇게 운 이유를 말하며 엄마까지 위로합니다.
앞으로도 절대 주님을 버리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당당하게 말합니다.
지금은 동생과 함께 싱가포르로 대학을 가려고 준비 중입니다. 
 
황창연 신부님의 강의 중에도 성당에서 봉사 열심히 하던 형제가 갑자기 봉사하고 집에 가던 중 교통사고로 죽었는데, 어머니가 아이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를 때 아버지가 아이 꿈에 나타나서 천국 앞까지 같이 걸어갔던 이야기를 오히려 해 주어서 어머니가 놀랐다는 이야기도 같습니다. 
 
죽음 앞에 선 사람에게 주님은 힘을 주십니다. 
죽음을 이길 힘은 성령뿐입니다. 
하느님은 생명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죽음을 극복하려고 하는 이에게 오십니다.
모든 병을 고칠 수 있는 명의가 굳이 약국에서 사 먹어도 낫는 병을 고치겠다고 그 집에 방문할 일은 없을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당신만이 하실 수 있는 가장 큰 일, 곧 죽음을 이기는 일을 하고자 하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죽음을 현재화하고 그 고칠 수 없는 병을 극복하려 한다면 주님은 분명 성령을 주시어 이 세상에서 끈기 있게 당신을 증언하는 사람으로 만들 것입니다.
이것이 죽음을 현재화하여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은총이고 우리가 나아가야 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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