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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1월 22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1-11-22 조회수 : 1520
11월22일 [연중 제34주간 월요일]
 
루카 21,1-4
 
하느님은 사랑이시기에 질투하신다 
 
오늘 복음은 ‘과부의 헌금’입니다. 
이것을 묵상하면 하느님의 이런 속성이 떠오릅니다. 
“주 너의 하느님인 나는 질투하는 하느님이다.”(탈출 20,5)
왜냐하면, 예수님은 헌금통을 보시며 당신 아버지께 얼마나 정성을 바치는지 지켜보시기 때문입니다. 
 
‘질투’라고 하는 말이 하느님에게 어울리지 않는 말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질투 없는 무한한 사랑을 부어주시는 분으로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느님이 질투하지 않으시면 우리를 물건 취급하시는 것입니다. 
 
만약 내가 사랑하는 애완견이 있다고 합시다. 
산책하다 그 애완견이 나를 따라오지 않고 다른 애완견을 따라갑니다.
그럼 질투가 납니까? 애초에 애완견을 사랑하기는 하지만 나와 인격적인 관계를 맺거나 혼인할 사이는 아니기에 크게 질투가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만약 애완견이 아니라 아내나 자녀라면 어떨까요? 자녀가 옆집 아빠를 더 좋아하면 어떨까요?
아내가 집에 들어와서 계속 직장 상사만 칭찬하면 어떨까요? 질투가 납니다.
왜냐하면, 아내와 자녀는 개가 아니라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질투’를 느끼신다는 말은 인간을 당신과 같은 수준으로 드높게 여기신다는 방증입니다.
그러니 오히려 질투하지 않으면 사랑이 아닙니다. 
 
그런데 ‘질투’와 ‘시기’를 구분할 필요도 있습니다. 
“라헬은 자기가 야곱에게 아이를 낳아주지 못하는 것 때문에, 언니를 시샘하며 야곱에게 말하였다.
‘나도 아이를 갖게 해 주셔요. 그러지 않으시면 죽어버리겠어요.’”(창세 30,1)
 
여기서 라헬은 언니 레아에게 질투하는 것일까요, 시기하는 것일까요? 이것은 시기하는 것입니다.
시기는 사랑하는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 자아에 묶인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자아는 소유하려는 욕망입니다.
자신이 소유했다고 믿은 것을 빼앗긴 것에 대해 분노하는 것이 시기입니다.
모차르트를 시기하였던 살리에리는 자신이 모차르트를 죽였다고 말했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빼앗아갔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질투는 무엇일까요? 질투는 사랑하는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사랑을 주려는데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 사랑을 받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도 받을 그릇을 준비해야 줍니다.
분명히 내 사랑은 금잔에 받아야 하는데 소주잔을 들고 따르라고 한다면 어떨까요? 내 사랑은 나의 피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도 그에 합당한 잔을 준비해야 합니다. 
 
혼인 잔치 때 쫓겨나는 종이 그런 사람입니다. 
당시 혼인 잔치에 초대하면 의복까지도 챙겨주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것도 팔아먹고 온 것입니다. 
이때 그 사람이 혼인 예복까지 팔아먹도록 정신이 팔리게 한 것에 대한 분노가 질투입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사악의 아내를 찾으라고 종을 보냈습니다. 
온갖 장신구와 옷과 낙타도 보냈습니다.
이 모든 것을 받은 레베카는 하나도 다른 곳에 쓰지 않고 그것으로 자신을 장식하고 이사악 앞으로 나아왔습니다.
이사악은 그녀를 자신의 어머니 천막으로 데리고 들어갑니다. 
어머니 천막이란 자궁을 의미합니다.
자신을 만든 어머니의 자궁에서 자신과 한 몸이 되는 아내를 만드는 것입니다. 
 
만약 레베카가 받은 것들을 아버지에게도 주고 오빠에게도 주고 형제들에게도 주고 해서 천한 옷을 입고 왔다면 이사악은 그 모든 것들에 질투하였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가난한 과부의 헌금이 바로 레베카가 자신이 받은 모든 것을 오롯이 이사악을 위해 다시 봉헌하기 위해 가져온 것과 같은 모습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이사악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뒤이어 나오는 성전파괴와 연관됩니다. 
“몇몇 사람이 성전을 두고, 그것이 아름다운 돌과 자원 예물로 꾸며졌다고 이야기하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루카 21,5-6)
 
그들은 성전을 자신들의 ‘자원 예물’로 지었다고 자랑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봉헌한 것은 쓰고 남은 것들입니다.
하느님을 모실 집을 쓸 거 다 쓰고 눈치 보며 낸 것으로 지은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인격적으로 대하시기 때문에 당신이 주시는 사랑만큼 우리도 응답하기를 원하십니다.
성모 마리아만큼 응답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성모 마리아는 영원히 허물어지지 않는 성전이 되셨지만 그들의 성전은 로마 군인들에게 짓밟혔습니다. 
더는 예수님께서 살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려면 나도 그에 합당한 응답을 하여야 합니다. 
사랑은 질투하는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개를 사랑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과 동등한 인격적 존재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러니 그 사랑에 응답하려면 우리도 그분이 내어주시는 것처럼 내어드릴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다 쓰고 남는 시간이 기도드리는 것은 항상 우리를 향하고 계신 분께 질투를 일으키는 일입니다.
그 질투가 쌓아다 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느님께 질투를 일으키지 맙시다. 
결국엔 자기 손해입니다. 
가난한 과부를 닮아야 합니다. 
 
조앤 롤링은 기차를 타고 가다 갑자기 해리포터의 이야기가 자신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느끼고 뛸 듯이 기뻐하였습니다.
그녀는 포르투갈의 포르토란 도시에서 영어교사를 하며 동시에 해리포터의 글도 쓰고 있었습니다.
이때 카페에서 만난 텔레비전 저널리스트인 조지 아란테스와 결혼합니다.
딸까지 낳았지만 아란테스는 폭력을 행사하고 놀면서 아내가 벌어오는 돈으로 생활하는 한량이었습니다.
 
롤링은 둘째 아이를 밴 상태여서 더는 그런 남자와 살 수 없어 다시 영국으로 도망치듯 돌아왔습니다.
그녀는 이미 해리포터 2권까지 집필이 끝난 상황이었습니다.
물론 영국으로 돌아와서도 내용이 너무 어둡다는 이유로 12군데 출판사에서 퇴짜를 맞았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10년 동안 7권의 시리즈를 내면서 현재 1조 원이 넘는 재산을 가지고 있고 수백억 원씩 기부하며 출판계와 영화계에서 활발한 활동을 해나가고 있습니다. 
 
아란테스는 굴러온 복을 차버린 것입니다. 아란테스와 헤어져서 해리포터를 쓴 것이 아니라 이미 그때 해리포터가 잉태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란테스는 아내와 아이들, 그리고 그녀의 꿈도 받아줄 그릇이 되지 못했습니다. 
결국, 자신이 일하던 방송국을 살 수도 있는 재능이 있는 아내를 자신의 그릇, 혹은 자신의 집을 너무 허술하게 지어서 다 쫓아내고 만 것입니다.
지금의 조앤 롤링을 보며 얼마나 땅을 치며 후회하겠습니까?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도 자리가 필요하고 공간이 필요하고 집이 필요합니다.
그 집을 지으려면 자원 예물이 필요합니다. 
그분은 나에게 당신 자신을 주시는데 우리는 남는 것만 주어서야 어떻게 그분의 자리가 마련될 수 있겠습니까?
 
그분께서 질투하시는 것은 우리가 그분 아닌 사랑하는 모든 것들입니다.
그분 아닌 모든 것들 중 어떤 것에도 애정을 쏟는다면 그분은 질투하십니다.
가난한 과부처럼 주님만으로 충분하다는 마음으로 내 모든 것을 내어드릴 수 있을 때 우리는 질투하는 신을 신랑으로 맞아 하느님과 온전히 하나가 되는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하느님처럼 되고 싶다면 그분께서 들어오시기에 합당한 성전을 지읍시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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