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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1월 21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1-11-21 조회수 : 1561
11월21일 [그리스도왕 대축일]
 
요한 18,33ㄴ-37
 
진리보다 진리의 증언
 
오늘은 전례력으로 한 해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항상 한 해의 마지막 주일은 그리스도왕 대축일로 지냅니다.
그리스도께서 왕으로서 마지막 때에 심판자로 오심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왕은 당신의 백성을 선택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왕으로 영접한 이들만 마지막 때에 당신의 나라에 살게 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를 왕으로 영접할 수 있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내가 임금이라고 네가 말하고 있다. 
나는 진리를 증언하려고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왔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 목소리를 듣는다.”
 
알 것 같으면서도 조금은 아리송한 말씀입니다. 
분명 예수님은 당신이 진리요, 길이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당신이 진리를 ‘증언’하러 오셨다고 하십니다. 
증언자는 분명 진리 자체는 아닙니다.
그러면서 이미 진리에 속한 사람만이 당신의 목소리를 듣는다고 하십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진리를 증언하는 이에게 속하는 것이 곧 진리에 순종하는 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진리’란 한 마디로 무엇일까요?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 하나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께서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믿지 않고 뱀의 증언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피해서 숨었습니다.
이것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결정적 이유입니다. 
 
진리를 다시 회복함은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다시 회복함을 의미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누군가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큰지 알려줄 대상이 필요합니다.
 
만약 하와가 하느님의 사랑을 감소시키는 뱀의 말 대신 온 에덴동산을 주신 분이 아버지이심을 알려줄 중개자를 만날 수 있었다면 죄에 떨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진리는 에덴동산입니다.
에덴동산이 곧 하느님입니다.
그래서 에덴동산에 고마움을 갖게 해 줄 증언자를 먼저 만났어야 합니다.
그가 하와가 탄생하기 전에 이 모든 것을 다 보았던 아담입니다. 
 
아버지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증언이 성경입니다. 그러면 성경을 믿으면 될까요? 물론 그렇습니다.
그러나 말씀은 증언자를 통하여 레마로 바뀝니다. 로고스가 레마로 변하게 해 줄 증언자를 만나야 합니다.
목동으로 치면 천사이고 동방박사로 치면 별입니다. 이것을 도움의 은총이라고도 합니다. 
 
성경은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다고 모두가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천사나 별을 쫓아온 목동이나 동방박사들만 구원되었습니다. 
참다운 증언자에 속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처럼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그 진리는 우리가 잘 압니다.
그러나 그 진리를 증언하는 누구에게 속하느냐가 구원의 핵심입니다.
빌라도는 진리를 증언하는 예수님께 속할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는 이미 진리를 안다고 착각했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휘둘렸기 때문입니다. 
 
오징어 게임에 이어 넷플릭스 흥행몰이를 했던 ‘마이네임’의 스토리는 이렇습니다.
조폭이며 지명수배자인 아버지를 둔 지우는 고등학생입니다.
지우는 자기 생일에 자신을 괴롭히는 친구들을 때려주고 자퇴하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도망 다니던 지우의 아버지는 지우 생일이기에 전화합니다. 
지우는 아빠 때문에 자기 인생이 망가진다고 화를 냅니다.
아빠는 경찰들이 잠복해 있는 것을 알면서도 지우의 생일을 축하해주기 위해 집으로 찾아옵니다.
그때 문 앞에서 누군가에게 아버지가 살해당합니다. 아버지는 지우를 지키기 위해 죽어가면서도 끝까지 아빠를 지킵니다. 
 
진리는 아빠가 지우를 사랑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지우는 그것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누가 아빠를 그렇게 만들었는지 알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복수를 하겠다며 아버지의 유일한 친구인 조폭 두목 무진을 찾아갑니다. 
아버지와 무진은 생을 같이하는 친구입니다.
 
처음에 무진은 지우를 돌려보내지만, 지우의 끈질김에 무진도 지우를 키워주기로 합니다.
지우는 여자이지만 오래전부터 단련한 킥복싱과 무진의 특별 훈련 덕분으로 엄청난 실력을 갖춘 성인이 됩니다.
무진은 총 한 자루를 주며 아버지를 죽인 사람이 강력계 형사 차기호라고 말해줍니다.
지우는 경찰이 되어 차기호 밑으로 들어가 아버지의 복수를 하려 합니다. 
 
차기호는 피를 흘리며 지우를 알아봅니다. 
그리고 지우의 아버지는 자신이 동천파 소탕을 위해 들여보낸 경찰이라고 말해줍니다. 
무진은 자신을 구해주었던 지우의 아버지를 굳게 믿었지만, 경찰의 첩자인 것을 알고 죽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지우는 믿어보려 했지만 이제 적이 되어 지우의 복수를 기다려야 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지우는 무진에게 복수하고 드라마는 끝납니다. 
 
윤지우가 바랐던 것은 아버지의 복수였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진실을 알아야 했습니다.
마치 바다의 물고기가 어부가 없이는 우리 밥상으로 올라올 수 없는 것처럼 그렇게 이어줄 사람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우는 아버지의 친구였다는 이유로 진짜 원수를 믿어버렸습니다. 
 
아버지가 지우를 사랑했다는 것은 진리입니다.
그러나 그 진리는 그것을 증언해 줄 믿을 수 있는 대상을 통해서가 아니면 의미 없어집니다.
그 믿을 수 있는 대상이란 자신을 경찰이 되게 하여 이용하는 사람이 아닌 자신을 위해 피를 흘려주는 이여야 합니다.
이 역할을 교회가 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참 진리에서 어긋나가 가르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그것에 대해서는 교회 밖에 있는 것입니다.
잘못 배우면 하느님 사랑을 알아도 하느님을 왕으로 모시지 못합니다. 
 
제가 로마에서 성경을 공부할 때 한 교수 신부님은 예수님께서 당시 시대 상황이 그렇지 않았다면
십자가에 돌아가시지 않으셨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교회의 가르침에 반합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시러 오셨습니다.
따라서 그분은 교회에서 가르치고 계시지만 실제로 자기 개인적인 해석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만약 그분을 따라간다면 저도 이상한 해석을 하고 결국 예수님의 십자가가 저에게 큰 의미가 없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의미를 잃는다면 예수님을 더욱 사랑하기 어려울 것이고 신앙은 힘을 잃게 됩니다. 
 
팩트를 전하는 성경이 우리를 구원해 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해석해 주는 진리의 증언자가 우리를 구원으로 이끕니다.
그렇다면 성경을 온전히 해석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진리의 기둥은 무엇일까요? 
 
“내가 늦어지게 될 경우, 그대가 하느님의 집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교회로서, 진리의 기둥이며 기초입니다.”(1티모 3,15)
 
예수님께서 진리 자체이시면서도 또한 빌라도 앞에서 진리를 증언하는 사람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안에 머물러야 진리 안에 머물며 하느님을 임금으로 섬길 수 있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진리 자체보다 그 진리를 온전히 증언해 줄 파견자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가톨릭교회’입니다. 
 
나는 하와이고 진리는 에덴동산입니다. 
그리고 증언자는 뱀과 아담 둘이 있습니다.
진리 자체보다 진리를 해석하고 가르쳐주는 올바른 증언자를 만나는 게 더 중요합니다.
에덴동산에 영원히 머물려면 뱀이 아니라 에덴동산을 증언해 줄 아담, 곧 교회에 머물러야 하고 그 증언만을 믿어야 합니다. 
사랑은 진리보다 증언자가 중요합니다.
사랑은 이미 내 안에 있고 내가 그 안에 살고 있기에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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