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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1월 20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1-11-20 조회수 : 1590
11월20일 [연중 제33주간 토요일] 
 
루카 20,27-40
 
죽음과 부활에 대한 믿음 없이 성장할 수 없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과 사두가이들의 부활 논쟁입니다. 사두가이들은 현세주의자들입니다.
이들도 이스라엘 사람으로 하느님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부활은 믿지 않았습니다.
다음 세상이 있다면 지금 하는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부활을 믿지 못한 이유는 자신들이 집착하는 것을 잃기 싫어서입니다. 
믿지 못한 것이 아니라 믿지 않은 것입니다.
부활을 믿는 사람의 삶과 믿지 않는 사람의 삶은 그래서 확연히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부활을 믿지 않으려는 사두가이들을 피터 팬 증후군을 앓는 사람이라 여기고 싶습니다.
피터 팬은 어른이 되기를 원치 않는 대명사입니다.
피터 팬은 자신이 성장하면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 말하는 부모의 대화를 듣고 집을 도망쳐 어린이들만 들어올 수 있다는 네버랜드에 사는 아이입니다.
그리고 다른 아이들도 그곳에 들어오기를 초대합니다. 왜냐하면, 혼자는 재미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피터 팬의 작가 제임스 배리도 160cm에서 성장이 멈추었고 결혼을 해서도 부부의 관계가 원활하지 못했고
옆집의 어린이들을 좋아했습니다.
그들은 결국 전쟁터에 나가서 죽거나 물속에서, 혹은 기차에 뛰어들어 죽는 비극을 맞았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비극을 맞은 것이 배리의 탓이라는 명확한 증거는 없었지만, 그가 더 집착하고 사랑한 아이들부터 그렇게 죽었습니다.
자라야 하는데 멈추고 싶은 마음은 현세주의자라기보다는 실제로 현실도피자입니다. 
 
제임스 배리가 그렇게 어린이들에 집착하였던 이유는 그의 삶이 어린 시절에 머물고 싶은 사건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어머니는 배리의 형을 너무나 사랑하였습니다. 그런데 스케이트 사고로 형이 사망합니다.
어쩌면 배리는 형이 죽은 탓이 자신에게 있는 것 같다고 여겼던 것 같고 어머니도 매일 눈물로 큰아들만 찾았습니다. 
 
어느 날 배리가 방에 들어갔을 때 어머니가 “데이비드 너냐?” 하고 물었습니다.
배리가 “저, 배리에요.”라고 대답하자 어머니는 다시 등을 돌리고 울기 시작했습니다.
순간 배리는 강한 분노와 좌절을 느꼈고 그렇게 그의 성장은 멈추고 말았던 것입니다.
 
배리는 “나는 형이 죽은 나이 13살이 되면서부터 일부러 성장을 멈추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분노와 좌절은 마치 꾸어 준 돈을 받지 못해 그 생각만 하게 된 수전노처럼 어머니의 관심에 대한 집착만 남게 되었고 그래서 그는 어머니의 또 다른 데이비드가 되기 위해서만 살게 된 것입니다.
 
배리는 형의 흉내를 내며 어머니의 사랑을 갈구했지만 진짜 배리의 모습은 끝내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어른이 되어서도 자신이 했던 것처럼 자신에게 아이들도 사랑을 갈구해주기를 바랐습니다.
그렇게 배리의 집착에 시달리며 자란 아이들은 대부분 배리와 마찬가지로 불행한 삶을 살았습니다. 
 
태아의 부활은 무엇일까요? 태어남입니다. 
태아는 어머니 태중에서 양식을 먹고 보호를 받습니다.
내가 양식을 먹는다는 것은 성장한다는 말이고 성장한다는 말은 언젠가 새로 태어나야 한다는 뜻입니다.
새로 태어날 일이 없으면 내 손으로 양식을 벌어먹어야 합니다. 
 
어린이에게 부활은 무엇일까요? 어른이 되는 것입니다. 역시 어린이들도 양식을 먹습니다.
양식은 부모가 주는 것입니다. 부모가 양식을 준다는 말은 새로 태어나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어른으로 새로 태어나야 현실주의자입니다.
그렇지 않고 부모의 양식을 먹으면서도 어린이로 남으려고 하는 현세주의자들은 현실도피자입니다. 
 
어른이 되면 양식이 필요 없을까요? 음식을 먹지 않고 40일을 버텨도 사랑을 먹지 않으면 4일만 지나도
죽고 싶은 마음이 든다고 합니다. 
이 말은 어른이 되어도 우리는 하늘에서 오는 양식을 먹는 태아와 같은 존재입니다.
태아는 어머니를 볼 수 없습니다. 
다만 기도를 통해 사랑의 양식을 먹으며 그것이 없으면 살 힘이 없음은 압니다.
 
부활을 믿고 싶으면 이 양식을 먹으면 됩니다. 
그러면 자연적으로 죽음이라는 것을 통과하여 새로운 세상으로 부활할 것임을 직감합니다. 
여러 번 해왔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피조물이 만들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창조자가 주는 양식입니다.
그러니 그런 양식을 먹으며 성장하면서 이 세상에만 머물려고 하는 사두가이들은 현세주의자이면서
실제로는 현실도피자입니다. 
 
부모가 주는 양식을 먹으면서도 부활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될까요? 그것은 곧 죽음과 같습니다. 
영화 ‘암살’(2015)에서 이정재는 몸에 총알이 7개씩이나 박히고 손가락이 잘리는 등의 고통을 겪으면서도 독립운동을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일본 헌병대에 동료들과 함께 체포되었고
동료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며 일본에 협력하기로 합니다. 
 
그는 김구 선생 밑으로 들어가 정보를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없이 일본에 팔아넘겼습니다.
김구 선생이 점점 의심하자 그는 자신의 동료들도 죽입니다.
당시 일본인들이 한국 독립운동에 대한 자세한 정보들을 알고 있었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이런 밀정들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수많은 독립투사가 희생됩니다. 
 
하지만 독립은 오고야 말았습니다. 그는 반민특위 법정에 세워졌고 증인들은 죽어갔습니다.
독립은 했지만, 일본의 힘은 여전히 건재했던 것입니다. 그도 증거불충분으로 무죄를 선고받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그렇게 죽이고자 했고 죽였다고 믿었던 이들이 나타났습니다.
작은 골목길에서 이런 마지막 대화가 나옵니다. 
 
“안오균?”
“왜 동지를 팔았나?”
“몰랐으니까. 해방될지 몰랐으니까. 알면 그랬겠나?”
“16년 전인가? 염석진이 밀정이면 죽여라. 지금 수행합니다.”
그렇게 마지막 심판을 받습니다. 
 
부활을 믿고 안 믿고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선택이지만 그 선택에 따라 이 세상에서 독립투사가 될 수도 있고 밀정이 될 수도 있습니다.
 
부활이 없다고 믿어야만 이 세상을 즐길 수 있다고 믿는 이들은 부활을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부활이 없는 인생은 무의미하다고 믿는 이들은 독립투사처럼 삽니다.
문제는 부활이 있고 난 뒤에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을 먹어야만 산다는 것을 믿는다면 우리는 누구나 창조자로부터 양식을 먹는 사람들입니다.
창조자로부터 양식을 먹는다면 성장하여 부활하란 뜻입니다.
이것을 거부하면 현세주의자로 살다가 태어나지 못하는 것과 같은 심판을 받습니다.
부활을 믿지 못하면 성장하지도 못합니다.
부활은 성장의 끝이기 때문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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