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18일 [연중 제33주간 목요일]
루카 19,41-44
평화는 곧 나의 환경: 나의 환경은 내가 지키는 법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평화를 원하지 않는 예루살렘을 보시며 이렇게 말씀하시며 우십니다.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 ! 그러나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
예수님께서 주시려는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은 당신 자신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루살렘 입성 다음 내용입니다.
예수님을 기쁘게 맞아들이는 듯 했지만, 그들은 자신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평화는 세속적인 평화였습니다.
그 일시적인 평화를 위해 영원한 평화를 알아볼 눈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려면 우선 평화를 깨는 것부터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평화를 깨는 것은 우리 생존을 위협하는 것들입니다.
누구나 자신의 생존에 위협을 받으면 평화가 깨집니다.
얼마 전 평균 고도가 2m밖에 안 되는 작은 섬나라 투발루 외교부 장관이 바닷물 속에서 연설한 뉴스가 있었습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그 자리는 육지였습니다. 하지만 기후변화로 인한 해수면의 급격한 상승으로
그 섬나라 주민들은 생존을 위협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평화로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네팔과 같은 높은 산지에 사는 사람들은 해수면 상승에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것으로 평화가 깨지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사람이 불안해지는 이유는 ‘생존이 위협받는 환경에 살기 때문’이라고 정의할 수 있겠습니다.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은 바로 ‘환경’입니다.
그런 환경을 조성할 줄 아는 사람은 심지어 많은 수가 걸리는 암과 같은 질병 앞에서도 평화로울 수 있습니다.
한상도 씨는 자연식물식을 하여 1년 3개월 만에 전립선암이 완치되었습니다.
이 경험으로 펴낸 책이 『수술도 없이, 약물도 없이 사라진 암』입니다.
2020년 암 진단을 받은 저자는 2021년 식이요법만으로 암세포가 사라지게 하였습니다.
처음에 의사는 당장 수술을 종용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더욱 근본적인 원인을 제거하려 하였습니다.
암이라는 것은 결과물이고 암이 생기게 된 원인과 과정을 돌아보고 수정하고 치유하여 앞으로도 암이 살 수 없는 조건과 환경을 만들어주려는 시도입니다.
수술로 당장 보이는 암을 제거할 수는 있어도 보이는 암은 물론 보이지 않는 암까지 (저절로) 사라지게 할 수는 없습니다.
암이 생기지 않게 하는 삶의 환경을 만들려고 한 것입니다.
이 책의 서문의 제목은 「나를 죽여야 내가 산다」입니다.
그리고 “2020년 5월 25일. 나는 나를 죽였다.”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암 진단을 받고 누구에게도 이 사실을 알리지 않았습니다.
그를 아는 사람 대부분은 그가 암에 걸렸다가 나았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다만 지금까지의 삶을 살던 자신을 죽이고 ‘생활 태도’를 뜯어고친 것입니다.
“나는 평소의 일상을 그대로 유지했다.
그와 달리 내적인 생활은 180도 달라졌다.
먹는 음식이 달라지고, 생활습관이 달라지고, 마음가짐이 달라졌다.
가리는 것 없이 닥치는 대로 먹던 습관을 버리고 몸에 좋은 음식을 철저히 가려 먹었다.
육류와 생선, 우유, 계란, 밀가루, 가공식품을 완전히 끊었고, 과일과 채소, 현미잡곡밥에 채소 반찬을 먹었다.
아침저녁으로 매일 1만 보 이상 걸었고, 주말에는 가까운 산을 찾았다.
아침에 일어나면 명상으로 하루를 시작했고, 어떤 상황에서도 밝고 긍정적인 생각을 유지했다.
암을 치료한다는 생각 대신 몸과 마음을 재생시킨다고 생각하고 행동했다.
그것뿐이다. 누구나 알고, 누구나 할 수 있는, 상식에 가까운 것을 묵묵히 실천했을 뿐이다.”
나의 생활 태도가 바로 건강을 위한 나의 환경입니다.
이 환경을 조성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병에 대해 불안해하지 않습니다.
그 병이 침투할 수 없는 환경을 조성할 줄 알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평화를 얻는 법을 아는 사람의 특징입니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이라도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 수는 없습니다.
죽음이란 생존을 위협하는 병은 누구도 이기지 못합니다.
그래서 결국엔 불안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는 환경은 없습니다.
코로나가 끝나면 안전할까요?
또 다른 불안이 시작될 것입니다.
결국, 죽음으로부터 자기를 보호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지 않으면 불안은 멈출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모든 피조물은 창조자 안에서 평화롭습니다.
동물 새끼들도 어미가 보호해주면 안전하다 느낍니다.
우리가 생겨났을 때 가장 안전한 장소는 어디였을까요? 바로 어머니 태중이었습니다.
태중의 아기는 부모의 태중에 머무는 것 하나만으로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삶은 발전이 없습니다.
존 A. 셰드는 “항구에 머물 때 배는 언제나 안전하다. 그러나 그것은 배의 존재 이유가 아니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부모는 자녀를 더 큰 세상으로 내보내기 위해 자녀를 분리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려 하지 않아도 사춘기가 되면 자녀는 더는 부모가 자신들의 평화로운 환경이 될 수 없음을 알게 됩니다.
이때 찾아야 하는 것이 하느님입니다.
하느님이 아버지이시고 교회가 어머니입니다.
참 평화는 내가 하느님 태중에 있음을 믿는 것으로 얻어집니다.
순교 성인들은 죽음의 칼날 앞에서도 평화로웠습니다. 그 이유는 창조자 안에 머묾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창조자를 알 수 있을까요?
바로 양식과 보호와 가르침을 주는, 곧 살과 피를 내어주는 대상으로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당신이 창조자이심을 알리시기 위해 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셔서 살과 피를 양식으로 내어주게 하셨습니다.
이 세상에 하느님이라고 하시며 우리의 양식이 되어주신 신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분만이 우리 유일한 피난처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예수님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들의 피난처를 자신들이 만들 능력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느님 태중에 머물며 하느님의 법을 지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어느 공간이나 그곳에 머물려면 그 공간을 제공하는 이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암을 극복하려면 그것이 침투할 수 없는 공간에 머물려야 하는데 그 공간에 머무는 방법이 자연식물식단법이었습니다.
어느 공간이나 법이 존재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법을 따름으로써 하느님 품에 머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때 느끼는 평화가 이미 땅이 아니라 하늘에 머물고 있음을 믿게 합니다.
태중의 아기는 자기 자신을 믿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공간에서 벗어나려고 어머니의 뜻을 어길 줄 모릅니다.
그러니 평화로울 수 있습니다.
결국,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아 스스로 평화를 찾게 만드는 것이 ‘자아’입니다.
나를 죽이고 그리스도 안에 머물면 평화롭습니다.
내가 그분처럼 될 수 있다고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불안 자체인 내가 죽고 그분 안에 머물 수 있고 영원한 생명으로 이 세상에서부터 평화롭게 살게 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