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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1월 16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1-11-16 조회수 : 1504
11월16일 [연중 제33주간 화요일]
 
루카 19,1-10
 
욕망의 종말: 아버지의 인정
 
세관장 자캐오는 부자였습니다(루카 19,1-10 참조).
자캐오는 예수님을 보기 위해 나무 위까지 올라갔습니다.
그런 정성을 보시고 예수님은 많은 사람 중에 자캐오의 집에 가서 머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자캐오는 자기 집에 ‘기쁘게’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구원을 얻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모으기만 했던 삶에서 내어주는 삶으로의 전환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사실 사람을 받아들이는 것은 그 사람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뜻은 사랑입니다.
사랑을 받아들였는데 재물을 좋아하는 욕구를 동시에 지니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자캐오는 왜 굳이 예수님을 자기 집에 모시려 했을까요? 예수님에게서 무엇을 없애고 싶었을까요?
돈에 대한 욕심입니다. 돈에 대한 욕심을 없앨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예수님을 자신 안에 모시는 것입니다.
혼자 힘으로는 욕심을 제어할 수 없는데 욕심은 자아에게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아가 사라지지 않는 한 욕심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아를 버리면 나를 움직일 선장이 없어집니다.
따라서 자아를 밟고 내 주인이 되실 분을 내 안에 모시는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욕심은 왜 생기는 것일까요? 인정받지 못해서 생기는 것입니다. 부모님이 자녀를 인정해 줄 때 자녀들이 굳이 돈 욕심부릴 필요가 없습니다. 
부모님이 다 책임져 줄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춘기가 되면 사정이 바뀝니다. 
부모가 자신의 참 부모가 아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눈을 다시 넣어줄 수도 없고 생명을 다시 줄 수도 없습니다.
 
내가 지금 세상에 왜 존재하는지에 대한 불안이 다시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존재감을 채우기 위해 세상 것들에 대한 집착이 커지는 시기가 사춘기입니다.
참 창조자, 참 아버지를 만나기 전까지 이 욕구는 그래서 사라지지 않습니다. 
 
인간의 욕구는 결국 ‘아버지로부터의 인정’으로 종말을 맞습니다.
자캐오는 아버지의 인정이 곧 예수 그리스도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창조자 곧 부모는 자녀 앞에서 세속-육신-마귀의 욕구를 쫓지 않습니다.
사랑과 반대되는 욕구이기 때문입니다.
자기와 같은 욕구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자신을 위로할 수 없습니다. 아버지가 아닐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부모에게 인정받을 때를 생각하며 부모처럼 순수한 마음으로 자신을 사랑해주는 사람의 위로를 기대합니다. 
 
로빈 윌리엄스와 멧 데이먼이 주연한 영화 ‘굿 윌 헌팅(Good Will Hunting)’의 줄거리입니다.
고아인 ‘윌(멧 데이먼)’은 양부모에게 길러졌지만, 양아버지에게 학대만 받고 컸습니다.
지금은 MIT 공대에서 청소부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습니다.
윌은 공부를 한 적은 없지만, 수학, 법학, 역사, 경제 등 모든 면에서 천재입니다.
MIT공대에 노벨 수학상을 수상한 램보 교수가 복도에 써 놓은 문제를 단숨에 풀어버립니다.
누가 그 문제를 풀었는지 찾아내기 위해 그 교수는 더 어려운 문제를 복도 칠판에 써 놓았고 윌이 그 문제를 풀어내는 것을 목격합니다. 
 
하지만 반항기 어린 윌은 교수까지도 무시합니다.
그리고 지나가다가 어렸을 때 유치원에서 자신을 괴롭혔던 친구가 보이자 달려가 마구 두들겨 팹니다.
그러다 자신을 말리는 경찰까지 폭행합니다. 이전까지는 천재적인 머리로 자신을 변호하여 풀려났지만, 경찰 폭행은 수천만 원의 보석금이 아니면 영창을 살아야 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램보 교수는 노벨상을 타기는 하였지만 새로운 무언가를 내어놓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천재 윌을 빼내기 위해 두 가지 제안을 합니다. 첫 번째는 자신을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제안을 받아들여 램보 교수를 도와줍니다.
그러나 정신과 치료는 잘 안 됩니다. 
정신과 치료를 하는 사람들보다 윌이 한 수 위였기 때문입니다. 
 
램보는 마지막 희망으로 자신의 친구 숀에게 부탁합니다.
숀은 얼마 전 아내와 사별하여 거의 폐인처럼 사는 시골 대학 심리치료 교수입니다.
숀을 본 윌은 그림 하나를 보며 숀을 다 파악합니다. 
배 위에 있는 외로운 남자의 그림입니다.
그러며 아내와 좋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함부로 말을 합니다.
역시 숀도 화가 나서 윌에게 폭력을 쓰려 합니다.
그러나 어쩐 이유에서인지 숀은 윌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만나겠다고 합니다. 
 
숀은 다른 정신과 의사들과는 다르게 그가 함부로 말한 아내가 자신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였는지 말해줍니다.
천재인 것은 알겠지만 그렇게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게 아니라고 말합니다.
자신의 아픈 면을 말했으니 윌도 마음을 열라고 합니다.
 
윌은 자신이 그렇게 된 것이 어렸을 때 부모에게 버려지고 양자로 입양되었으나 그 집에서도 양아버지에게 폭력을 당했던 것을 말합니다.
윌은 어쨌건 그런 환경 때문에 자신이 지금 망나니처럼 사는 것을 정당화하고 있었습니다.
숀은 말합니다.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윌은 자신도 안다고 말했고 자꾸 그러니 화를 내다가 정말 위로를 받습니다.
그리고 한없이 눈물을 흘립니다. 
그전까지는 이런 위로를 거부하였습니다.
그러면 자기가 잘난 척하며 남을 깔보며 사는 삶이 합리화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누군가의 위로를 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이용하기 위해 빼낸 램보 교수보다는 아버지와 같이 자기를 안아주는 숀에게 위로를 받아들이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후로는 누구도 마음 아프게 하는 일은 하지 못하게 됩니다.
마음 아프게 했던 여인에게 용서를 청하고 그녀를 찾아 떠나며 영화가 끝납니다. 
 
우리는 누구나 세상 것에 욕심을 내는 사람은 나의 창조자가 될 수 없음을 압니다.
부모님은 자녀 앞에서 그런 것들을 초월하는 모습을 보였기에 우리는 참된 창조자, 곧 세속-육신-마귀에서 멀어져 순결한 사랑만을 간직한 이에게 위로를 받고 싶어 합니다.
부모, 혹은 창조자의 위로만이 나를 모든 욕망에서 자유롭게 해 줄 참된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성체는 바로 이런 목적으로 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캐오를 인정하시고 그의 집에 들어가시는 것처럼 우리 안에 들어오십니다. 
그리고 당신과 하나라고 말씀하시며 우리가 아버지의 자녀임을 믿게 해 주십니다.
이 믿음만이 우리가 욕망의 덫에서 벗어나게 해 줍니다. 
 
세상에 이런 위로와 인정이 존재하는데 그것을 거부하는 이유는 욕심을 부리며 사는 것이 더 좋기 때문입니다.
미사의 목적은 이렇게 내 안에 자아와 생존 욕구를 사라지게 하고 그리스도께서 나를 지배하시게 하기 위함이지 욕망을 채우기 위함이 아닙니다.
 
우리는 마치 맛있는 음식과 몸에 좋은 음식을 선택해야 하는 것처럼 욕심과 인정,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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