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12일 [연중 제32주간 금요일]
루카 17,26-37
주님을 찬미할 때 평화가 오는 이유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에 이어 ‘하느님 나라’가 이룩된 사람의 특징을 말해줍니다.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는 우리 안에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주인이 되셔서 다스리시면 우리는 하느님 나라가 됩니다.
오늘은 그렇게 주님의 지배를 받는 사람의 특징이 무엇인지 말하고 있습니다.
나를 지배하시는 분이 하느님이시다면 그 특징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라는 것입니다.
요한 바오로 2세 성인께서는 “저는 행복합니다. 여러분도 행복하세요!”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셨습니다.
주님의 뜻을 따르고 있다면 나는 주님의 집에 살고 있고 주님 품 안에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뜻’은 누군가로부터 나에게 오는 것이고 그 뜻을 따름은 그 사람에게 속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내가 늑대에게 자라 늑대의 뜻을 따라 늑대처럼 산다고 가정해봅시다.
그 사람은 본능적으로 늑대에 속해 있고 늑대 가족 무리에서 편안함을 느낄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에게 자라 부모가 원하는 뜻대로 자라는 아이라면 당연히 그 부모에게 속한다 생각하고 그 부모가 자신의 안전을 책임져줄 것이라 믿습니다.
저는 태어날 때부터 노아의 홍수 비슷한 것을 거쳐야 했습니다.
제가 태어나던 해에 엄청난 홍수가 있었는데 우리 집이 그나마 가장 높이 지어져서 마을 사람들은 마지막엔 우리 집으로 다 모입니다. 저는 기억을 하지 못하지만, 미군 부대에서 헬기가 와서 지붕을 뚫고 저희를 구출했다고 합니다.
저는 태어날 때부터 어머니 등에 업혀 비행기를 탔습니다.
제가 조금 자라서도 큰 홍수가 또 났습니다.
물이 점점 불어 마을 사람들은 우리 집으로 다 모였습니다.
길과 논의 구분이 사라졌고 어른들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상의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우리는 어땠을까요? 팬티만 입고 나가서 물놀이하고 놀았습니다.
어른들은 논으로 빠지면 위험하다고 했지만 우리는 마냥 즐겁기만 했습니다.
부모님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동네는 미군 부대 바로 옆이기에 미군들이 다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이번엔 미군들이 철책을 끊고 보트를 끌고 우리를 구조하러 왔습니다.
팬티만 입고 여군들도 있는데 보트에 타는 것이 조금 창피하기는 했지만 두려움은 없었습니다.
며칠 동안 여관에서 머문 뒤 돌아왔을 때는 동네에 물이 다 빠진 상태였습니다.
만약 우리가 죽는 것이 두려워 벌벌 떨고 있었다면 우리를 지켜주시는 부모님을 믿지 못하는 꼴이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 동네는 홍수가 잦아서 부모님과 마을 어른들이 지켜주고 계심을 잘 믿을 수 있었습니다.
어떤 때 아버지는 일 나갔다 돌아오실 때 마을에 홍수가 나서 들어오실 수 없으셨는데 수영을 하셔서 저희를 구하러 오신 적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사람은 내가 뜻을 따라주는 대상에 속함을 알고 그 대상이 나를 지켜줄 것을 믿습니다.
당연히 내가 주님의 뜻인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고 있다면 나는 죽음도 두렵지 않아야 합니다.
내가 뜻을 따라주는 하느님은 영원한 생명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죽음이 두려운 이유는 내가 그분 뜻을 따르지 않기 때문에 내가 그분께 속하지 않음을 스스로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나는 어떻게 주님의 뜻을 따를 수 있을까요? 뜻이 양식과 가르침을 통해 옴을 알아야 합니다.
부모의 뜻은 자녀들을 향한 희생을 통해 들어옵니다. 나를 사랑해주지 않는 사람의 뜻은 내 안에 들어올 수가 없습니다.
나를 사랑해주는 분의 뜻을 받아들였다는 말은 내가 그분께 감사와 찬양을 드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누구도 부모에게 감사하지 못하면 그 부모의 뜻을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사춘기 아이들이 부모의 뜻을 거부하는 경우가 많은데 부모의 뜻은 자녀 안에서 부모에 대한 고마움과 함께 사라집니다.
따라서 내가 죽음의 두려움도 없이 살려면 주님의 뜻을 따라 주님께 속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내가 주님께 감사하고 찬미를 드리고 있는지 살펴야 합니다.
언젠가 강력한 허리케인이 미국의 플로리다주를 강타한 적이 있었습니다.
기상 역사상 그 유래를 찾을 수 없을 만큼 대형 허리케인이 카리브해에서 발생해서 예고도 없이 플로리다주를 강타한 것입니다.
그곳에 조그마한 호수가 하나 있었는데 이 호숫가에 찰스 시어즈라는 사람이 그의 아내와 세 명의 어린 자식들과 함께 사는 집이 있었습니다.
순식간에 다가온 허리케인에 의해 호수의 제방이 무너져 버렸고 그로 인하여 집이 허물어졌고 간신히 빠져나왔지만, 온통 물바다였습니다.
가까스로 조금 높은 지역에 있는 고목을 찾아 피신하였습니다.
그러나 물은 순식간에 차올라 점점 고목도
물에 잠기게 되었는데 그럴수록 이들은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하다가 결국 나무 꼭대기까지 오르게 되었는데 더는 올라갈 수 없는 처지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폭풍우는 계속되고 물은 계속 불어나고 있었습니다. 살아날 가망이 없다고 느껴지자 찰스가 절망적으로 중얼거렸다.
“여보 이젠 틀렸어.”
그 말은 단란했던 다섯 식구의 종말을 의미했습니다. 그의 아내는 그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여보, 그런 말 말아요, 무슨 수가 생길 거예요. 당신은 아이들이나 잘 보호하세요.”
그것은 소망이 아니라 마치 절규와도 같은 소리였습니다.
물은 점점 차오르더니 이젠 물이 어른들의 턱까지 차올랐습니다.
한 손으로는 나뭇가지를 붙잡고 한 손으로는 아이들을 찰스와 그의 아내가 물 위로 바쳐 올렸습니다.
이제 조금만 차오르면 그나마 가망이 없어지는 상황이었습니다.
찰스는 다시 중얼거렸습니다.
“이젠 틀렸어! 여보.”
그러자 그의 아내는 물을 삼키며 하늘을 향해 부르짖었습니다.
“아니에요, 여보. 우리는 살 수 있어요.”
그리고 순간 찰스의 아내는 무엇인가 그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음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신앙을 잊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보 우리가 주님을 잊고 있었네요.
주님은 우리를 살려 주실 거예요.”
그들은 최대한 목을 물 밖으로 내밀고 찬송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너 근심 걱정하지 말아라. 주 너를 지키리. 주 날개 밑에 거하라. 주 너를 지키리.
주 너를 지키리. 아무 때나 어디서나 주 너를 지키리. 늘 지켜주시리.”
그 순간 찰스와 그의 아내는 두려움이 사라지고 감사가 솟구치는 감정을 감당할 수 없어서 울음을 터트렸습니다.
자신들을 안타깝게 지켜보시는 주님의 현존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때 그들은 호숫가에 있었던 낡은 배 한 척이 자신들을 향해서 떠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의 가족들은 그 배를 타고 그곳을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극적으로 살아난 그들이 간증한 것을 ‘가이드 포스트’에 게재한 실화라고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감사하고 찬미하는 분의 뜻을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 뜻을 따르면 나도 모르게 그분의 품 안에 있음을 깨닫게 되고 평안을 찾습니다.
평화로워야 모든 일이 잘 풀리는 것입니다.
평화롭지 않으면 주님을 믿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주님을 찬미하는 이는 죽음도 이기시는 주님 품에 안겨 있음을 느끼고 평안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두 예를 드십니다.
바로 노아의 홍수와 소돔의 멸망입니다.
이때 방주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두려워 떨었을까요? 방주는 바로 그리스도의 품입니다.
그분께 감사하면 그 뜻이 내 주위에 방주를 만듭니다. 그리고 홍수와 같은 죽음 앞에서도 의연할 수 있습니다.
또 천사들과 탈출하고 있던 롯이 두려움에 떨었을까요? 오히려 감사했을 것입니다.
천사에게 감사하고 그 품에 있으면 유황이 자신들 위로 떨어지지 않을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다만 세상에 집착이 남아있던 롯의 아내만이 세상을 떠나는 것이 두려워 뒤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되었습니다.
롯의 아내는 천사를 찬미하는 이가 아니라 세상 것들에 집착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면 교회 안에 있어도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자아를 따르고 찬미하기에 세상에 속하여 세상에서 떨어지는 것을 극히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