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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1월 7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1-11-07 조회수 : 1400
11월7일 [연중 제32주일] (평신도 주일)] 
 
복음: 마르코 12,38-44
 
봉헌 없는 기도: 뱀의 소굴로의 초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들을 조심하라고 하십니다.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 먹으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한다.”
사실 오늘 복음의 주제는 ‘기도’입니다. 율법 학자들의 기도와 과부의 기도를 대조하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과부는 헌금함에 자신이 가진 재산을 다 넣었습니다. 
이 말은 기도하며 자기 자신을 많이 내어놓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반면 율법 학자들은 자신을 내어놓지 못하고 타인의 가산마저 등쳐 먹는 자기를 키우기 위한 기도를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저는 이런 기도를 ‘가스라이팅 기도’라 하고 싶습니다. 
가스라이팅은 본래 연극에서 유래한 말인데, 상대를 교묘한 방법으로 자기 뜻대로 조종하려는 것을 뜻합니다.
 
관계의 기본은 상대의 자유를 인정해주는 것으로부터 시작되는데 상대를 자기 뜻대로 조종하려 한다면
이는 나와 펫(애완동물), 혹은 나와 물건의 관계가 됩니다. 상대의 자존감을 무너뜨리고 상대의 삶을 지옥으로 만드는 관계입니다.  
 
그런데 이런 관계가 나와 하느님 사이, 특별히 기도하는 사람에게서 나올 수 있습니다. 
율법 학자들이 바로 그렇게 기도를 길게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최고야 원장의 『벼랑 끝, 상담』에 이런 사례가 나옵니다.
20대 중반에 무역회사에 다니며 이미 팀장의 자리까지 오른 능력 있는 여자 청년의 이야기입니다. 
이 자매는 어렸을 때 항상 부모의 싸움만 보며 자랐습니다. 
그중에서도 피해의식이 컸던 엄마가 큰 문제였습니다. 
엄마는 모든 분풀이를 딸에게 해대고 있었습니다.
 
딸이 수학 95점을 받아 반에서 1등을 하고 기뻐서 엄마에게 내밀었을 때 엄마는 그 시험지를 찢어버리며
 “내가 이런 점수 보자고 이 고생하며 키웠냐?”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딸은 엄마의 감정 쓰레기통이 됨과 동시에 엄마를 기쁘게 해 주기 위해 죽도록 공부만 해야 했습니다. 
 
딸이 취직하여 자취할 때도 찾아와 온종일 눈물을 흘리며 신세타령을 했습니다.
 견디다 못한 딸이 엄마가 이러는 게 너무 힘들다고 말하자 엄마의 폭언과 비난이 이어졌습니다.
 “내가 너를 얼마나 힘들게 키웠는데, 나한테 이따위로 대해? 딸년이 돼서 엄마를 생각할 줄도 모르냐, 미친년아. 네가 그러고도 잘 될 것 같냐.”
 
그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그런 스트레스가 폭발할 때면 자해를 하며 풀었습니다. 
엄마를 피해 자취방을 몇 번이나 옮겼지만, 엄마는 며칠도 안 돼서 딸을 찾아냈습니다. 
엄마가 자기를 찾아내는 방법을 알아낸 후에야 더는 엄마가 못 찾게 방을 옮겼고 이젠 평화로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엄마에게 이렇게 가스라이팅을 당한 이 청년은 부모에게 못 받은 사랑을 남자친구를 통해 받으려 했습니다. 
얼굴도 예쁘고 능력도 있어서 남자친구는 쉽게 사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존감이 너무 낮다 보니 엄마가 하던 똑같은 방식으로 남자를 자신의 것으로 삼으려 했고 그렇게 많은 남자가 떠나갔습니다.
 
그러다 정말 자라며 사랑을 많이 받은 한 남자를 사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카톡에 바로 답장을 안 하면 갖은 욕설을 퍼붓고 심지어는 직장까지 자신이 알아봐 준 곳으로 옮기라고 말하며 아예 집을 나와 자신과 동거하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집에 있으면 마치 개처럼 취급했습니다. 
남자가 떠나려는 기미가 보이면 자해를 하며 피 흘리는 모습의 사진을 보냈습니다. 
남자도 자취방을 여러 번 옮겨보았지만, 그녀는 어머니가 했던 방식으로 며칠 만에 금방 남자친구를 찾아냈습니다.
 
남자친구의 권유로 최고야 원장을 찾아왔고 최 원장은 여자가 자신의 문제를 직시하게 하였습니다.
 남자친구가 자신에 대한 사랑이 1%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는 적잖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유일하게 이 남자만이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해주었기에 여자는 이 남자를 잃고 싶지 않았습니다.  
 
남자친구도 마지막 화해를 위해 여자 친구의 자취방에 들어가기로 하였는데 단, 조건이 두 개 있었습니다.
원래 다니던 직장에 다시 다니게 해 주는 것과 여자의 집에 있을 때는 자신이 텐트를 치고 그 안에 들어가면
건들지 않는 조건이었습니다. 
최소한의 자유의 공간을 원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잘 안 되었습니다.
여자는 남자친구가 자기의 집에서 자신만의 공간을 가지고 들어가 있는 것을 보는 것은 참을 수 없었습니다.
자신을 거부한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남자친구를 잃고 싶지 않았습니다. 
생전 처음으로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또 참지 못하고 싸우다 텐트를 부숴버렸습니다. 
그토록 미운 어머니가 자신에게 한 것을 자신도 남자친구에게 그대로 하는 것이었습니다.
점점 시간이 지나고 여자는 조금씩 남자친구에게 자유를 주기로 했습니다. 
카톡을 1시간 동안 보지 않아도 참아내고 남자친구를 자기 집에 살도록 강요하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둘은 잘 되었을까요? 
그 결과는 나오지 않습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누군가가 필요하여 자신 안으로 받아들이려면 그 사람이 자유롭게 머물 공간을 내가 제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공간을 제공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나의 욕구입니다. 교만이고 성욕이고 소유욕입니다. 
여기에서 가장 버리기 쉬운 욕구가 있다면 소유욕입니다. 
그 사람을 소유하지 않기 위해 아주 작은 자유의 공간을 제공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자신의 공간 안에서 자신을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나게 할 것입니다. 
분명 자신 혼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텐트를 부숴버리면 그 사람은 내 안에 있어도 하나의 물건으로 전락하거나 그걸 견디지 못하면 도망갑니다. 
이렇게 누군가와 관계를 맺을 때 절대 소유해서는 안 되는 것이 그 사람의 자유이고 그 자유를 내어주는 것을
자기 봉헌이라 합니다.
 
오늘 율법학자들은 과부의 가산을 등쳐 먹는 이들이었습니다. 
소유욕을 버리지 않으려는 이들입니다. 
이들이 하는 일은 자신의 욕구로 타인들을 자기 소유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하느님에게도 합니다.
 돈을 많이 벌게 해 달라거나 명예를 높여달라거나 자녀가 잘되는 것만을 청합니다. 
그러면서 하느님께서 자신 안에서 머물 공간을 내어주지 않습니다.
 
주님에게 내 안에서 공간을 허락하는 첫 번째 시도가 소유욕을 죽이는 것입니다. 
그 공간에서만큼은 주님은 자리를 차지할 수 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하느님께서 그 공간을 얻으시기 위해 원하셨던 것이 선악과를 봉헌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선악과를 봉헌하는 곳에 주님께서 내려오시는데, 그 자리를 뱀의 것으로 내어준 것입니다. 
이것이 죄이고, 이것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구약과 신약 내내 그것이 십일조로 굳어졌고 이젠 미사 안에서 빵과 포도주로 상징적으로 봉헌됩니다.
 
예수님께서 과부의 헌금을 보시는 것은 봉헌이 하느님을 위한 공간을 어느 정도 만들어주는 것인가와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과부는 모든 가산을 봉헌하였기에 자기 뜻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렇게 욕구가 사라진 과부 안에 하느님은 한가득 당신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게 되십니다. 
 
미사 때 우리는 어떠한 정신으로 봉헌을 해야 할까요? 
바로 과부와 같이 “내 뜻을 봉헌하니 당신 뜻이 온통 나를 차지하소서.”라는 마음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성찬례 때 모실 성체가 머물 자리가 나에게 마련됩니다. 
율법학자의 하느님까지 가스라이팅 하는 기도에서 벗어나 하느님께 자유를 드리기 위해 내 욕구를 내어드리는 봉헌을 할 줄 알아야겠습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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