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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0월 29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홍보실 작성일 : 2021-10-29 조회수 : 1576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있는 가운데 또 안식일에 수종을 앓는 사람의 병을 고쳐주십니다.
아무래도 그들이 예수님을 식사에 초대해놓고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지 시험하기 위해 수종을 앓는 사람을 들여보낸 것 같습니다. 
 
어쨌든 예수님은 그들의 속셈을 아시고 이렇게 물으십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는 것이 합당하냐, 합당하지 않으냐?”
그들은 분명 ‘합당하지 않다.’라고 대답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시험하려 하는 처지에서 왈가불가할 수는 없는 상황이라 침묵합니다. 
 
예수님은 그의 손을 잡고 병을 고쳐주신 다음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 누가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지면 안식일일지라도 바로 끌어내지 않겠느냐?”
그러자 그들은 또 아무 대답도 못 합니다.
이 침묵은 종전의 침묵과 사뭇 다릅니다.
처음에는 속셈이 있는 침묵이었고, 이번 침묵은 이론으로는 반박할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침묵입니다. 
 
만약 그들도 이런 단순한 비유를 떠올렸다면 안식일 법을 그렇게 복잡하게 가르치며 실제로는 그 본질에서 벗어나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교리는 복잡해졌고 일반 대중들에게 이해될 수 없는, 무조건 믿고 따라야 하는 뜬구름과 같이 되어버렸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장황한 말씀으로 설득하려 하지 않으십니다.
‘비유’로 간단히 설득하십니다.
언어로 하는 설득은 ‘머리’까지 들어가지만, 비유로 하는 설득은 ‘가슴’까지 들어갑니다.
머리는 사고하는 데 사용되지만, 가슴은 ‘직관’을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태극기를 보고 손을 가슴에 올리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태극기는 하나의 상징이며 비유입니다.
그런데 그 비유는 머리의 단순한 이해를 넘어서서 가슴으로 나라를 사랑하게 만듭니다. 
 
원효 대사의 모든 것은 마음에 달렸다는 ‘일체유심조’ 사상을 전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수많은 논문이 필요할까요? 아닙니다.
단지 그가 유학길에 올랐을 때 해골 물을 마신 이야기만 해주면 됩니다.
그렇게 맛있었던 물이 해골 물임을 안 이후로 구토가 올라왔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비유를 통한 가르침은 대중들의 마음에 깊이 새겨집니다.
이런 교리는 그 사람들이 모조리 사라지지 않는 한 지구상에서 없어지지 않습니다.
따라서 지상에 존재하는 대형 종교는 이야기식의 비유로 교리를 전달해 왔습니다. 
 
그런데 이런 교리 전달 방식이 어려운 ‘이론과 학문’으로 바뀌는 경향이 발생합니다.
그래서 비유와 상징, 스토리가 사라집니다.
이렇게 되면 어려운 것을 좋아하는 지식층이나 부유층만 좋아하지 민중들의 가슴에 새겨질 수 없게 됩니다. 
 
현재 성탄 트리와 같은 것을 봐도 그렇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죄로 우리가 먹지 못하게 되었던 생명 나무가 오신 것에 대해 감격해서 눈물을 흘려도 모자랄 판에 그것이 무엇인지 잊어버렸습니다.
비유와 상징이 죽은 것입니다. 
 
비유와 상징이 죽는 이유는 ‘돈’ 때문입니다.
얼핏 이해가 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인도에서 불교가 완전히 사라져버린 이유를 알면 이해가 쉽습니다.
처음 불교 교리는 매우 쉬웠습니다.
모든 고통은 집착에서 나오고 그 집착하게 만드는 자아를 놓아버리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인도가 불교에 심취하였고 나중에는 나라가 불교를 지원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승려들은 큰 절에 머물며 더는 구걸하러 다니며 민중들에게 불법을 설파할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큰 절에서 교리만 더욱 부유층에게 합당하게 만들어갔습니다.
그렇게 단순하던 교리는 평민들은 이해할 수 없는 어려운 철학과 같은 학문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자 이슬람이 침범했을 때 대중들 안에 있던 쉬운 종교인 힌두교는 살았지만, 학문으로만 남아있던 불교는 완전히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민중의 심장에 머무르지 않는 교리는 정권과 돈과 함께 사라집니다.
우리나라 의천의 천태종과 지눌의 조계종도 마찬가지입니다.
의천은 말 그대로 금수저였습니다.
왕의 아들이었습니다.
교리의 체계화를 통해 불교가 통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지눌은 어려운 교리보다는 깨달음을 강조하였습니다. 직관입니다.
그 직관적 깨달음을 조금씩 실천해나가면 된다고 믿었습니다.
현재 남아있는 것은 지눌의 조계종입니다.
천태종은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민중의 가슴에 교리가 들어가려면 그들이 ‘직관’을 이용하게 해야 하고 그 방법이 비유와 상징과 스토리인 것입니다.
이런 식의 교리교육이 아니면 일 년 동안 가르쳐도 예비 신자들에게 교리의 확신을 안겨줄 수 없습니다. 
 
소리굽쇠가 있습니다.
한 소리굽쇠를 치면 옆에 있는 다른 소리굽쇠가 그 소리를 받아서 진동합니다.
친 소리굽쇠를 손으로 잡아도 그 소리를 받은 다른 소리굽쇠는 여전히 그 진동의 소리를 냅니다.
이렇게 소리굽쇠가 서로 공명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소재와 모양이 같기 때문일 것입니다.
소재가 다르면 아무래도 덜 공명이 일어날 것입니다. 
 
사람의 심장은 소재가 같습니다.
내 심장이 공명하면 상대의 심장도 공명합니다.
내가 상대에게 더 잘 전달하기 위해서는 먼저 내 심장을 울려야 합니다.
내 심장이 울려지는 것은 비유입니다.
그것을 찾아내기 위해서는 정말 심장을 짜내는 고통을 감내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의 심장을 울리지 못하는 것은 누구의 심장도 울리지 못합니다.
이 때문에 어렵더라도 우리는 교리를 비유로 가르쳐야 합니다.
사실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면 비유를 찾아내는 것이 어렵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비유 하나로 평생 안식일을 주제로 공부해 온 사람들의 입을 막아버리셨음을 깊이 묵상합시다.
우리가 쓰는 언어가 그냥 ‘소리’에 불과할 수 있고, ‘말’이 될 수도 있으며, ‘비유나 상징’이 될 수도 있습니다.
소리는 귀에만, 말은 머리에, 그리고 비유는 가슴까지 내려갑니다.
사람의 마음에 도달하는 것은 비유나 상징, 스토리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방식이 사라지는 이유는 돈이나 육체, 권력에 대한 욕심 때문임도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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